기독교에서 바라보는 전쟁과 평화
I. 서론
가. 우리의 믿음과 행함에 있어 유일한 근거가 되는 성경은 평화에 대한 어떤 명확한 본문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사실상 이것을 제시함에 있어서 역설을 나타낸다. 구약은 군사적 방법으로 평화를 이루려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약은 그 갈등을 영적 용어인 빛과 어두움으로 나타낸다.
나. 과거와 현재에 있었던 세계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성경적 믿음은 이러한 갈등이 없는 번영의 황금시기를 추구했고 아직도 그것을 기대한다.
1. 사 2:2-4; 11:6-9; 32:15-18; 51:3; 호 2:18; 미 4:3
2. 성경적 믿음은 인간으로 오시는 메시아에 대해 예언한다, 사 9:6-7
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이 갈등이 있는 세상에서 살 것인가? 이에 대해 사도들이 죽은 이후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으로 발전된 3가지 유형의 기독교적 반응이 있다.
1. 평화주의 – 고대에는 드물게 나타났던 생각이지만 이것은 로마의 군대 사회에 대한 초대 교회의
반응이었다.
2. 정의로운 전쟁 – 콘스탄틴의 회심(주후 313 년) 이후에 계속되는 야만족들의 침입에 대한 반응으로서 교회는 “기독교 국가”가 군사적으로 행할 것을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고대헬라인들의 입장이었다. 이 견해를 암브로스가 처음으로 주창했고 어거스틴이 확장하고 발전시켰다.
3. 십자군 - 이것은 구약의 거룩한 전쟁과 유사한 개념이다. 이것은 중세에 이슬람이 “성지”와 고대
기독교 지역이었던 북 아프리카, 소 아시아, 동로마제국을 점령한 것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국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를 위하여 행해졌고 또한 교회의 후원을 받았다.
4. 세 가지 견해는 모두 기독교적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타락한 세상의 제도에 대처할
것인가에 대한 다른 관점이 발전한 것이다. 각각의 견해는 성경의 어떤 본문을 강조하는 한편 다른 곳은 배제시켰다. 평화주의는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려는 경향을 가졌다. “정의로운 전쟁”은 악한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 국가의 권력을 증진시켰다(마틴 루터). 십자군의 입장은 교회가 타락한 세상의 구조를 공격하여 이를 지배해야 한다는 점을 고수했다.
5. 로랜드 H. 베인톤은 아빙돈 출반사가 출판한 그의 책 전쟁과 평화에 대한 크리스천의 태도 15쪽에서 말하기를, “종교개혁은 세 가지 역사적 입장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종교전쟁을 촉진시켰다: 루터교와 성공회의 정의로운 전쟁을, 개혁교회의 십자군 전쟁을, 재침례파와 후기 퀘이커들의 평화주의가 그것이다.
18세기는 문예부흥의 이상인 인간 평화 사상을 이론적으로와 실제적으로 부활시켰다.
19세기는 상대적인 평화의 시기였고 전쟁을 없애기 위한 대격동의 시기였다.
20세기에는 두 차례 세계대전이 있었다. 이 시기에 다시 한 번 세 가지 역사적 입장이 재현되었다. 특별히 미국에 있는 교회들은 제1차 세계대전시 십자군의 태도를 가졌다; 두 전쟁 사이의시기에는 평화주의가 팽배했다; 제2차 세계대전시의 분위기는 정의로운 전쟁으로 나타낼 수 있다.”
라. “평화”의 정확한 정의에 대하여는 논란이 있어 왔다.
1. 헬라인들은 이것을 사회적 질서와 일치로 여겼다.
2. 로마인들은 이것을 갈등이 없는 상태로서 국가의 힘을 통해 얻어진다고 보았다.
3. 히브리들은 평화를 인간이 하나님께 적합하게 응답함에 기초한 하나님의 선물로 여겼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농경적 의미를 가졌다(참조, 신 27-28 장). 이것은 번영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전과 보호를 포함한 개념이었다.
II. 성경의 자료
가. 구약
1. 거룩한 전쟁은 구약의 기본적 개념이다. 출 20:13과 신 5:17에서 “죽이지 말라”는 히브리어에서 계획된 살인(BDB 953)을 가리키는 것이지 사고, 격노, 혹은 전쟁에 의한 죽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야웨는 그의 백성을 대신해 싸우시는 전사로도 나타내신다(참조, 여호수아-사사기, 또한
엡 6:15 에서 암시된 사 59:17).
2. 하나님은 전쟁마저 그릇된 길로 가는 그의 백성을 벌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신다 – 이스라엘의 앗시리아 포로(주전 722년); 유다의 신바벨론 포로(주전 586 년).
3. 이러한 군사적 환경에 비추어 볼 때 구속적인 평화주의로 구분되는 이사야서 53장의 “고난받는 종”이 기록된 사실은 충격적이다.
나. 신약
1. 복음서는 군인들을 정죄하지 않고 언급한다. 로마 “백부장”은 거의 모든 경우 고상한 의미에서 말해진다.
2. 믿는 군인들조차 그들의 직업을 버리도록 요구받지 않았다(초대교회).
3. 신약은 정치적 이론이나 행동으로 사회적 악을 다루도록 자세한 지침을 주지않고 영적 구원의 문제로 여긴다. 초점이 육체의 싸움에 있지 않고 영적 전쟁에 있었다. 그 전쟁은 빛과 어두움, 선과 악, 사랑과 미움, 하나님과 사탄의 싸움이다(엡 6:10-17).
4. 평화는 세상의 문제에 대한 마음의 자세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갖는 관계(롬 5:1; 요 14:27)이지 정부와 관련된 내용이 아니다. 마 5:9 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정치가가 아니라 복음 전파자이다! 다툼이 아니라 교제가 교회생활의 특징이 되어야 한다. 이 특징은 교회 안에서 또한 세상에 대해 나타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