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탑과 그리스도의 몸
•부제: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사람들
본문: 창 11:1-9
7만3천톤의 강철, 만3천38개의 들보와 철판, 105만846개의 리벳과 볼트로 만들어졌습니다. 1665개의 계단과 높이는 324미터입니다. 이는 81층의 건물과 맞먹는 높이입니다. 1930년 크라이슬러 빌딩이 완공되기 전까지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습니다. 녹을 방지하기 위해 7년에 한 번씩 페인트칠을 새로 하는데, 이 때 소용되는 페인트양만 최소 50톤 이상 들어간다고 합니다.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구스타프 에펠이 1889년 프랑스대혁명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열린 파리만국박람회를 위해서 만든 에펠탑입니다. 바로 박람회장의 출입문으로 건축되었습니다.
에펠탑을 건설할 때 '거대하고 기괴한 괴물'이라는 세간의 비아냥과 반대가 많았다고 합니다. 건립의 중단을 요구하는 많은 민원과 데모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파리의 예술가들은 에펠탑이 파리의 아름다움을 헤치는 쓰레기더미라고 혐오하며 경멸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특히 시인 '베를렌'은 “흉측한 에펠탑은 보기도 싫다”며 잘 보이지 않는 골목길로만 다녔다고 합니다. 또 ‘목걸이, 여자의 일생, 죽음처럼 강하다’와 같은 작품으로 잘 알려진 '기 드 모파상'도 에펠탑을 비난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거의 매일 에펠탑 안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즐겨 마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당신은 에펠탑을 혐오한다고 하면서 왜 매일 에펠탑에서 커피를 마시느냐'고 물었더니, “파리에서 에펠탑을 보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바로 이 에펠탑 안이기 때문이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이 에펠탑을 허물자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 에펠탑은 프랑스인들의 긍지를 불러일으키는 세계에서 가장 멋진 건축구조물로 쏜 꼽힙니다. 에펠탑은 프랑스에 막대한 경제적인 이득을 가져다주는 돈버는 효자상품입니다. 프랑스인들은 에펠에게 크게 고마워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도 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다 아는 바벨탑 이야기입니다.
1. 벽돌을 만드는 자들
이 바벨탑이 당시에는 혁신적인 공법으로 건축되었음을 본문은 증언합니다. 3절입니다.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1) 찍어내다
그들은 벽돌을 찍어낼 수 있는 틀을 먼저 만들고 이것을 이용해 똑 같은 모양과 크기로 벽돌을 만들었습니다. 이전까지는 햇볕에 벽돌을 건조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었으나 그들은 벽돌을 불에 구웠습니다(초벌과 재벌).
차드에서 뜻하지 않게 건물을 제법 많이 건축하였습니다. 한번은 데이케어센터를 짓는데, 벽돌을 구할 수 없어서 많이 애먹었습니다. 그곳은 벽돌공장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우기철이 끝날 때쯤 생활비를 벌고자 개인이 벽돌을 만듭니다. 그래서 각자 그 크기가 다다릅니다. 사실은 나름의 통상적인 규격이 있지만 작게 만들어 조금이라도 이득을 보려는 사람들이 임으로 틀을 작게 하여 결국 같은 크기의 벽돌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한 사람에게서 우리가 필요한 양의 벽돌을 모두 일괄 구입할 수 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데, 여기저기 다녀봐도 한 곳에서 만든 벽돌 량이 우리가 원하는 크기의 담을 쌓고 교실과 사무실을 짓기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사온 크기가 각기 다른 벽돌로 건물을 짓고 담을 쌓아야 했습니다. 크기와 모양이 다르니 벽돌을 쌓는 사람들도 힘들다고 삯을 더달라고 졸라댔습니다. 결과물도 예상했던 대로, 마치 처삼촌 묘 벌초한 것처럼 그 모양이 엉성했습니다.
바벨탑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벽돌을 만드는 틀의 크기와 모양이 일정하기 때문에 누가 찍어도 똑 같은 모양으로 똑 같은 크기로 찍어져 나왔습니다. 이것은 사실 바벨탑 쌓는 일을 주도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과 태도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바벨탑은 노아의 홍수 심판 이후에 함의 후손 중 니므롯이 주동이 되어 하나님을 조직적으로 대적하고 반역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입니다. 주동자 니므롯은 성경의 증언에 의하면 이 세상에 처음으로 나타난 히어로였습니다(영걸/ 창 10:8).
*창 10:8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나타난 영걸이라.
'영걸'이라는 단어를 쉬운영어성경은, 'a great soldier on the eart'라고 번역하였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영걸은 '깁보르'라는 단어인데 '강력한 세력을 지닌 자', '폭력으로 통치하는 자'라는 의미합니다(룻 2:1, 전 9:11). 창세기 10:9절은 "그는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으로 불리워졌다고 증언합니다. 오래된 문헌들에 의하면, 그는 사자나 표범을 잡아 길들여 사냥에 나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맹수를 앞세우고 전쟁을 일삼고 도시들을 정복하고 피정복민들을 노예처럼 부렸다고 합니다. 그는 역사상 처음으로 제국을 건설하고 통치했던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통치를 영구히 하기위해 자신을 신격화하고 스스로를 높여 하나님처럼 굴었습니다.
•벽돌- 부속품 같은 인간
"자, 우리가 벽돌을 만들자"라는 말속에 그들의 무서운 음모가 스며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마치 벽돌을 찍어내듯 획일적으로 만들어 통제하려 했습니다. 노예처럼 취급하면서 그들 위에서 군림하고 그들의 노동을 착취하고 그들의 자유를 억압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 세상과 세상의 제국 안에서는 모든 것들이 획일화 되어야 합니다. 개인의 개성, 다름, 다양성이 무시되고 하나로 취급됩니다. 나아가 하나의 가치와 체계만을 인정하라고 합니다. 개인의 생각이나 특성을 무시하고 거대한 조직의 하나의 벽돌로만 남아 있도록 강요합니다. 획일화된 대중 속에 자신만의 고유한 이름도 없이 대중 속에서 익명의 존재로만 남길 강요하는 세상이 곧 바벨탑입니다. 전체를 위해 단지 하나의 부속품처럼 취급되어지는 곳이 이 세상제국입니다.
2) 우리의 이름을 내고/ 바벨탑을 쌓는 목적
-벽돌 하나하나에 자신들의 이름을 세겨서 구웠다고 합니다.
공산당 선언이 1848년에 발표되고 인본주의 선언문이 1933년에 발표되었다. 40년 후 1973년에 선언문 II가 발표되고 30년 후에 선언문 III이 발표되었다.
인본주의 선언문 I은 15개 조항으로 구성되었는데 성인경은 그의 글에서 중요한 신조를 정리하여 세 가지 관점으로 요약하였다.
1)인간은 단지 자연의 물질적 산물이다( 창조아닌 진화론)
2)이성과 과학이 최종 판단 근거이다(하나님의 말씀이 인간 자신)
3)초자연주의와 절대주의를 반대한다(하나님의 주권, 섭리 배격)이다.
*참조: 라브리문서
•에덴동산-인본주의의 뿌리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범한 사건임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나님과 같아 지리라. 너희는 피조물이 아냐.
•절대로 죽지 않아- 생명을 포함한 너희 운명은 너희가 결정하고 만들 수 있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떠먹기 전까지- 인간에게 선악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3) 흩어짐을 면하자
그들이 바벨탑을 쌓은 동기중 하나는, '우리가 흩어짐을 면하자'는 말속에 잘 드러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축복을 거역하고 자신들의 힘과 지혜로 번영과 성공을 구가하겠다는 다짐입니다.
•에덴의 확장 / 하나님은 아담은 만드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인류에게 단순히 삶의 영역을 말해주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들을 낳고 그들로 더불어 온 땅에 나아가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는 대리자들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에덴 동산을 확대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는 공동체를 형성하여 세상에 나아갈 때 그들이 머무는 곳은 곧 에덴 동산이 되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은 성장하게 되어있습니다. 어느 한 특정한 공간에 갇혀 있는 외딴 섬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과 더불어 함께 성장하도록 창조된 곳이 바로 에덴 동산입니다.
•고유한 문화 / 흩어진 다함은 산산이 무너지고 흩뿌려지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온 땅으로 나아가 살면서 그곳에서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와 풍습을 가지고 다양한 모습으로 마음껏 개성을 펼치며 살기를 원하셨다는 의미입니다.
•다양성 인정 / 그러면서 이웃하고 있는 공동체와 평화롭게 형제애를 나누며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자신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간직한 채 남의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 배려하고, 서로 존중하고, 더불어 함께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 받은 것입니다.
•제국- 통제아래 두자/ 그러나 세상의 권력자, 세상 제국의 통치자는 자신이 온 세상을 통치하기 위해 거대한 탑과 성을 쌓고 사람들을 그곳에 모여 살게 하면서 그들을 통제하고 그들 위에 군림하려 했습니다. 자신이 그들에게 신으로 불리며 예배를 받으려 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쉽게 실현하기 위해 그는 사람들의 개성을 말살하고 모두를 마치 커다란 구조물의 하나의 부속품처럼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그들을 쉽게 통제하고 다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을 예배하는 제단
반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쌓으라고 명한 건축물이 있습니다.
*출20:25 “네가 내게 돌로 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신 27:5-7/ 5”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철기를 대지 말지니라.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또 화목제를 드리, 거기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
•벽돌이 아닌 자연 돌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제단은 똑 같은 모양과 크기를 가진 틀에 찍어낸 벽돌로 쌓아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하나님은 자연에 존재하는 돌을 가져 다가 있는 모습 그대로 제단을 쌓게 하셨습니다. 절대로 그 돌을 연장을 사용하여 다듬거나 가공해서는 안됩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양으로 그대로의 크기대로,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라 하셨다. 정이나 망치를 일절 대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돌을 가져 다가 그것들을 이리저리 모양을 맞춰가면서 구조물을 쌓게 하셨습니다.
•생긴 대로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둥글면 둥근 대로 뾰족하면 뾰족한 대로 투박하면 투박한 대로 자연 그대로의 돌들을 가져다가 하나의 제단을 쌓았습니다. 어찌 보면 볼품없고 투박한 모습의 제단에 제물을 바치라는 것입니다.
최고의 신, 아니 유일하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신에게 드리는 제사의 제단을 자연석으로만 쌓게 하심으로서 제사를 드리는 우리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 주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죄인 된 모습 그대로, 부족한 모습 그대로, 모나고 투박하고 볼품없는 모습 그대로 우리를 받아 주십니다.
이 제단이 무엇입니까?
성전이 세워지기 전 하나님의 백성은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제단이 성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의 제사를 자신의 죽으심으로 완성하셨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제사도 제단도 성전도 필요치 않게 되었습니다. 그가 친히 성전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자신과 함께 성전을 이루는 돌들로 부르십니다.
•참 성전 / 예수 그리스도, 그가 참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에 두 번에 걸쳐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당시 성전은 종교인들이 돈을 버는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멀리서 양이나 염소, 비둘기 같은 제물로 가지고 오면, 제사장들은 온갖 흠을 잡고 제물로 합당하지 않다고 트집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준비해둔 양과 염소, 비둘기를 아주 비싼 값에 팔아 폭리를 취하였습니다. 또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은 성전세를 내야 하는데 성전세로 내는 코인이 따로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이 업자들과 결탁하고 코인을 바꿔주는 수수료가 터무니없이 비쌌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자들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요 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그들이 "너 미쳤구나. 이 성전은 사십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만에 세우겠다고?"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21).
•우리를 당신과 성전으로 함께 지어져 가도록 부르십니다.
*엡 2:20-22/ 20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이돌(코너 스톤)으로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탑이 아닌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성전을 만드시기 위해 구성원들로 부르신 제자들을 보면 그들은 하나같이 그 모양도 각각 다 다르고 어찌 보면 형편없고 모난 모습이었습니다.
•다듬지 않은 돌들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 요한과 그의 형제 야고보는 어부였습니다. 이들은 같은 동네 출신 어부이며 동업자이였지만, 너무도 달랐습니다.
베드로는 급하고 다혈질에 즉흥적이며 호언장담하고 약속도 잘하지만 허풍이 삼한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은 우뢰의 아들이란 별명을 가진 것처럼 불같고 앞뒤 가리지 않으며 거칠고 사나우며 난폭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마태는 유대인이지만 로마정부를 위해 일하는 세리(세관원)이었으며, 나다나엘은 12명의 제자 중 가장 교육 수준이 높았으며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상인이 되려고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도마는 29세에 결혼하여 4명의 자녀를 둔 가장이었으며 목수와 석공일을 했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그 옆구리와 손의 창자국과 못자국을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굉장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시몬은 열심당이라는 당에서 활동하는 정치 혁명가로 로마정부를 전복시키려는 급진적 진보주의자였고, 가롯유다는 세례요한의 제자로 있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인물로 아버지의 사업을 돕는 경영2세대였습니다.
•충돌하는 욕망
그들의 이러한 다양함만큼이나 복음서는 그들의 거듭되는 실패와 분투와 의심을 여과없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치열한 경쟁을 하였습니다. 그들의 스승이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기 위해 예루살렘에 슬픔을 안고 올라가는데 그들은 그 길에서 각자 자신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투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 살로메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아주 가까운 친척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어머니를 동원하여 예수님께 높은 자리를 청탁합니다. 예수님의 좌우편에 자신들이 앉게 해달라고 대놓고 청원하여 다른 제자들과 심하게 갈등하며 다투기까지 합니다.
•모퉁이 돌
이렇게 각기 다른 배경과 기질을 가졌고, 각자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예수님에게 모여든 사람들을 하나님은 당신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지어지도록 모두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셨습니다. 각기 생각이 다르고 각각의 욕망이 충돌하고, 그래서 경쟁하고 다투고 싸우는 그들이 하나의 건물, 그것도 하나님께서 임재 하시고 사시는 성전이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모난 돌들을 연결하는 모퉁이 돌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118:22/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행 4: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
하늘 보좌를 비우시고 이 땅에 내려오신 나사렛의 예수님 때문입니다. 그가 기꺼이 낮아지시고 버림받으셨기에 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버린 그 돌을 하나님께서 취하셔서 당신이 거하실 집의 모퉁이 돌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돌과 연대하고 연결되어 하나의 집이 되게 하셨습니다.
•벽돌을 만들어 탑을 쌓는 자와 모난 돌들을 품어 성전을 만들어 가시는 예수님
이 세상 제국과 사탄을 상징하는 니므롯은 사람들을 규합하여 통제하고 폭압적으로 다스리며 군림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낮추어 우리를 섬기고 든든한 밑가지가 되어 주십니다. 그가 기꺼이 허리를 굽혀 우리의 발을 씻어주시고 섬겨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건물이 되어가고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노력보다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역청이 아닌, 모퉁이 돌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 벽돌을 찍어 탑을 쌓았던 사람들은 편리하게 역청으로 벽돌들을 연결하여 붙였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 무엇이 아닌 자신을 모퉁이돌로 드려 각기 제멋대로인 돌들을 서로 연결되게 하셨습니다.
바로 바벨탑을 쌓았던 그 건축자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제국에 쓸모없는 돌이라고 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건축자들과 심지어 제자들에게까지 버림받으면서도 욕하거나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용서하고 품으셨고, 그들의 그 끔찍한 적대감과 하나님을 향해 반역을 꾀하는 마음까지 끌어안고 잠잠히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세상의 건축자들로부터 그렇게 버림받은 예수님을 하나님은 삼일만에 다시 취하여 영원히 사는 산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그 돌에 연결만 되면 살아나 산돌이 되어 그와 더불어 영원한 하나님의 거처가 되는 것입니다.
제단- 그리스도의 몸(교회)
성경은 우리를 단지 건물로만 비유하지 않습니다. 몸으로 비유합니다. 롬 12:4-5 입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 12:4-5)
몸은 여러 지체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그 생명을 유지하고 머리의 뜻을 함께 펼쳐 나가는 살아있는 생명 유기체입니다. 유기체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은 이렇게 정의합니다. “많은 부분이/ 일정한 목적 아래 통일되고 조직되어, 그 각 부분과 전체가 필연적으로 관계를 가진 것”이라 정의합니다.
•다른 모양, 다른 사명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몸에는 무수한 지체가 있습니다. 그 지체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모양을 가지고 있으며 각기 다른 사명을 가지고 다르게 기능합니다. 그래서 그 어떤 지체가 다른 지체가 대신할 수 없습니다. 눈이 손의 일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상호보안, 상호의존
그리고 그 몸의 지체는 철저히 서로 의존적이며 상호 보안적입니다. 어느 한 지체가 아프거나 없으면 다른 지체에게 영향이 가게 되어 있습니다. 철저하게 연결되어 있고 온전히 서로를 위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롬8:28).
그러나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몸의 다른 지체와 붙어 있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교제합니다. 그러나 다른 성도들로부터 일부러 자신을 격리시킵니다. 그들은 머리 외에는 어떤 몸과도 연관을 맺기를 원치 않습니다.
하지만 몸은 하나의 지체로만 구성될 수 없습니다. 팔 하나만 가지고 있는 머리를 상상하실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몸은 팔 다리, 다른 기관이 없이 머리로만 구성될 수 없습니다. 그의 몸은 많은 지체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가 되지 않고는 그리스도와 하나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지체와 하나됨 없이는 머리와도 하나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단지 머리만이 아닙니다. 몸 전체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필요뿐 아니라 서로에 대한 필요로 묶여 있습니다(고린도전서 12:21/ 월드 첼린지).
그리스도의 몸은 다양함을 내포하되 분리되거나 분열되지 않고 머리를 위로두고, 그 아래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온전한 한 몸을 이룹니다. 그것이 몸의 신비, 즉 교회의 비밀입니다.
결론
바벨탑이 아닌 그리스도 몸을 이루는 것,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바벨탑을 쌓으려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름을 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죽음에 드려 모퉁이돌되신 주님께 연결되고, 또 다른 돌들과 연결되어 성전으로 세워져 가십시다. 우리의 이름이 아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하나가 된 몸으로 섬기십시다. 그럴 때 그분이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며 존귀한 자로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우리 하나님의 성전으로 함께 아름답게 지어져 가십시다. 우리 그리스도의 몸으로 온전히 세워져 가십시다. 이것이 우리의 본질적인 사명이요, 존재론적인 사명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