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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과 예수님

소소한행복^^ 2020. 7. 31.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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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창세기 22:1-14

 

1)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 이삭을 바치라 하시는 하나님 

초대교회의 집사였던 스데반이 예수님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때 그는 마지막 온 마음을 다해 자신이 증거하는 예수님이 자기들의 조상이 그토록 기다려온 메시아임을 설명합니다. 이를 증거하기 위해 구약의 역사를 아브라함부터 죽 설명합니다. 그는 아브라함에 대해 이렇게 증언합니다. * 7:2-3입니다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이시며, 3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부름을 받을 당시 아브라함은 우상숭배 하는 자였음을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신들과 자기에게 찾아오신 여호와 하나님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가 경배했던 신들은 한 번도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수없이 제사를 드려도 단 한 번도 그것에 대해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부르지도 않은 신이 찾아오셨는데 그분은 감히 가까이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분이셨습니다. 그분이 그에게 그 땅을 떠나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십니다. 잘못된 종교와 관습, 세계관으로부터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식솔들을 거느리고 길을 떠납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에 도착합니다.

가나안에 도착한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다시 그에게 다시 오시어 "내가 이 땅을 너와 네 후손들에게 기업으로 주겠다"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거기서 자기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을 위해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가 쌓았던 제단 중 가장 위대한 제단은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모리아산의 제단임을 우리는 지난 주일 예배 때 잠시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2) 하나님의 의도(인격적인 관계)

하나님께서 이렇게 아브라함에게 그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 하실 때까지만 해도 하나님은 당시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부와 번영을 위해 자식까지 번제로 바치는 일을 태연하게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 아들을 번제로 드리려 할 때 하나님은 급하게 아브라함의 손을 저지하셨습니다. 그를 저지하심으로, 자신은 그 신들과 다른 분이심을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이 아닌 우상에게 절할 때 마다 하나님은 안타까웠습니다. 심지어 자신들의 욕심을 위해 자식을 잡아 제물로 바칠 때마다 하나님의 마음은 괴롭고 아팠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러한 저급한 신이 아님을 보여주길 원했습니다. 악하고 괴팍하여 자신을 섬기는 자들에게 해코지하는 신이 아님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라 하셨지만 그것을 멈추라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날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은 종교, 전통, 관습에 스며 있는 우상들과는 확연히 다르신 분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맹목적인 종교의 신이 아닌 자신을 섬기는 자와 인격적인 교제를 원하시는 분임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 백성을 찾아오셔서 당신을 계시해 보이시고, 만나주시고, 말씀하시고, 들어주시고 교제하며 사귐을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진짜 이유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참 되신 하나님을 알아가며 그분과 인격적으로 친밀하게 교제하며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삭과 예수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삭을 번제로 바친 것은 팩트과 입니다. 역사죠. 그러나 그 이면에 하나님이 왜 이삭을 바치라 했는지 의도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이것은 아브라함 개인만을 위한 것이 아닌, 인류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와 계획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을 오늘 함께 묵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와 언약을 맺으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약속하십니다. "네 씨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다"는 것입니다. 그 씨와 복이 무엇인지를 역사 속에서 밝혀 주시고 가르쳐 주는 것이 성경입니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1) 그 씨가 누구인지 2) 그 씨를 보내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 속에서 일하셨고, 3) 그 씨를 통해 우리가 받고 누리는 복이 무엇이며, 4)그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전달되었는지, 5) 그 복을 누리는 자가 가져야 할 태도와 의무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1) 약속의 씨를 주시다

아브라함이 갈대아의 우르라는 도시국가를 떠나 하란에 머문 뒤 가나안 땅으로 떠났을 때 나이가 75세였습니다( 12:4). 그리고 100세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아들을 주십니다. 그 때 사라는 90세였고 이미 경수가 끊어 진지 오래였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말이죠. 이삭의 출생은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내가 아이를 낳을 수 없을 때 이삭을 주심으로 그것이 자연적인 출생이 아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임을 보여주십니다. 인간의 결과물이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신 결과임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약속하신 바를 실행하셨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구원과 관련된 일일 때 그것은 더욱 그렇습니다. 아무도 방해하지 못합니다. 사탄의 방해도 인간의 불순종이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실패하지 않으시고 실행하십니다.

 

2) 아들을 바치라

그런데 아브라함의 나이 150세쯤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다시 찾아오셔서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이제 네 아들 곧 네가 사랑하는 네 유일한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거기서 내가 네게 일러주는 산들 가운데 하나에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세기 22:2>

*번제란 동물을 잡아 그것을 조각 내어 불에 온전히 태워서 그 연기를 드리는 제사입니다

 

아브라함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하나님에게 되묻거나 항의하지 않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집을 나섭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두 명의 젊은 종들을 데리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길을 떠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 아들 이삭, 그리고 두 명의 종들 그래서 총 4명이 길을 떠납니다. 집을 떠난 지 3일째 되는 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장소에 도착합니다. 그 때 아브라함이 함께 데리고 온 종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여기서 기다려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 돌아오리라."(5)

아브라함의 이 말로 인해 이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이제는 네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두 사람의 이야기가 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훗날,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되는지 하나님께서는 기가 막힌 방법으로 연출하여 보여주십니다.

 

3) 나무를 지고 모리아산을 오르시는 아들

아브라함은 번제를 태울 나무를 아들이삭에게 지우고 함께 산을 오릅니다. 이 대목에서 성경은 아브라함은 나귀도 사용하지 않고 이삭과 더불어 맨몸으로 제사 장비인 불과 양을 잡을 칼을 챙겨 산에 오른다고 증언합니다. 나귀와 안장을 지우고 왔기 때문에 왔던 대로 나귀에 나무를 싣고 가면 쉽고 편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에게 나무를 지우고 가게 합니다. 이 이야기는 그냥 한 가정에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하나님의 지시와 섭리에 의해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님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9 17절을 보면 "예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라 하는 언덕까지 오르시니" 라고 증언하십니다

 

4) "아버지, 어린양은 어디에 있나요?"

그런데이삭이 무언가 이상함을 느낍니다. 번제를 드려야 하는데 제물이 없는 것 아닙니까. 집을 나설 때만 해도, 번제를 드릴 고장에 가서 돈을 주고 사려다 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모리아산 아래에 도착하고 산을 오르는 그 시점까지도 아브라함은 양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삭이 묻습니다.

아버지, 여기 불과 나무들은 있는데, 번제로 드릴 제물을 위한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그에게 답합니다

“아들아,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번제를 위한 양을 준비하실 것이다.”

 

이 때 이삭은 자신이 그 번제물이라는 것을 알아 차립니다. 제사를 지낼 장소에 도착하자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이삭을 묶을 때, 이삭이 조금도 저항하거나, 또는 아버지 아브라함을 저지하거나, 도망가지 않은 사실에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삭은 왕복 엿새 길을 여행을 할 만큼 자란 나이였다. 번제를 지을 나무를 직접 지고 산을 오를 수 있었던 이삭은 적어도 15세 이상의 청소년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115세나 그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이삭은 번제물이 자신임을 알았을 때, 또 아브라함이 자신을 묶을 때에 충분히 도망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완력으로 아브라함을 쉽게 막아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자신을 죽이려 할 때 그는 그 결정에 잠잠히 순종합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라는 선지자는 이것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53:6-7/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여기서 그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는 우리를 대신해 제물이 되신 예수님입니다. 그는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습니다

 

자신의 몸을 따뜻하고 포근하게 감싸주고 병충해와 가시 같은 것들로부터 보호해 주는 털이 모두 깎일 때에 잠잠한 양처럼 주님은 끔찍한 모욕과 비난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것을 묵묵히 다 받으셨습니다

*가야바 법정/ 예수님은 먼저 종교재판을 받습니다.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에게 끌려가 심문을 받습니다. 유대의 최고의 종교결정기관인 산헤드린 공회를 연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많은 증인들을 세워 거짓증언을 합니다. 예수님은 단 한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으시고 침묵합니다. 그러자 대제사장 가야바가 마지막으로 나섭니다. "내가 너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26:63). 이 말씀 앞에 주님은 입을 엽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묻는 질문 앞에는 잠잠하실 수 없으십니다. "네가 말하였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26: 64)

가야바는 이 말을 듣고 옷을 찢습니다. "그가 신성 모독하는 말을 하였다. 더 이상 무슨 증거와 증인이 더 필요하겠는가?"( 26: 65)

산헤드린에서 재판장이 옷을 찢는 것은 신성모독죄라는 판결을 내렸을 때 하던 행위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며, 일제히 일어나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며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조롱하며 말합니다.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 좀 해봐라. 너를 때린 사람이 누구인지 한 번 알아 맞춰봐라"( 26: 68). 

*빌라도 법정/ 다음날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당시 로마의 총독이었던 빌라도의 법정에 예수님을 세웁니다. 이때에도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예수님에 대해 수많은 말로 고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잠잠하십니다. 그것을 성경은 "발라도가 기이히 여겼다"고 증언합니다. 그는 예수님께 아무런 죄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잘못된 동기를 그를 고소한 것을 알기에 갈릴리 출신인 예수님을 갈릴리의 왕 헤롯에게 보냅니다.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오해함)

*헤롯의 법정/ "헤롯이......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 23:9-10).

사람들은 계속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십자가에 달릴 때에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구원자이면 너 자신부터 구원해보아라.”

심지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 좌우편에 달렸던 강도들 마저도 예수님을 조롱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간들의 끝없는 조롱과 멸시 비난과 고문 앞에서 주님께서는 잠잠하십니다. 십자가가 하나님의 뜻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5) 어린양을 준비하신 하늘 아버지

아버지 아브라함은 결박한 이삭을 제단에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칼을 들어 자기의 아들을 죽이려 합니다그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그를 부르시며 막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네 손을 그 아이에게 대지 말라. 너는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곧 네 유일한 아들이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므로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내가 이제 아노라.” <창세기 22:12>

성경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지시하지도 않았는데 그 때,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주변을 살펴보았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한 마리 수양이 뒤에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삭이 산에 오를 때, "아버지 번제로 쓸 나무는 여기 있는데, 번제로 드릴 양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친히 준비하시리라"하고 대답한 것이 그냥 한 말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이삭을 속이려고 한 거짓말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는 두 명의 종들을 산아래 두고 산을 오르기 전 그들에게 했던 말을 기억합니다

"너희는 여기서 기다려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 돌아오리라."(5)

우리 말 성경에는 번역할 때 빠졌지만, "우리가 너희에게 돌아오리라"라고 분명히 주어가 복수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실 것을 알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곳을 "여호와 이레"라고 부릅니다그 뜻은 본문에서 가르쳐 주는 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준비하실 것이다" 또는 "여호와께서 준비하신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 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그는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준비하신 어린양이라는 것입니다

 

*이삭은 죽어야 할 운명/ 우리의 모습, 우리의 운명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죽이라고 명령하셨고 창조주의 절대적인 명령은 지켜져야 했습니다. 이삭은 죽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즉 이삭의 모습을 통해 아담의 자식으로 태어나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어긴 자들로 죽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죄의 삯은 사망이요" 이것이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입니다. 그런데 반전이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마리의 양을 준비하셨고, 죽어야 하는 이삭,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제물로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그 양은 누구를 예표하나요? 나를 위해 내가 죽어야 하는, 2천년 전 나무 제단 위에서 죽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 나무 제단은 내가 죽어야 하는 곳입니다. 그 나무 제단은 내가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나 대신 누군가가 내 대신 희생을 당했습니다.

 

6) 그곳은 어디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지시하신 곳은 모리아산입니다. 놀랍게도 이 모리아산에 하나님의 성전에 세워집니다

"그때에 솔로몬이 예루살렘의 모리아 산에 주의 집을 건축하기 시작하였는데……" <역대하 3:1>

그곳 모리아산, 아버지가 아들을 제물로 바친 곳, 아니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할 때 그를 막아서고 친히 자신의 손으로 준비하신 어린양을 바치게 한 곳에서, 이스라엘은 매일 어린양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렇게 매일 죽어가던 어린양은 오실 하나님의 어린양, 하나님께서 친히 여호와 이레로 준비하실 어린양이신 그의 독자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바로 예루살렘의 모리아산의 봉우리에서 우리의 죄값을 대신해서 제물이 되셨습니다

 

7) 아름다운 동행

이 이야기는 아름다운 동행이 만들어낸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만들어낸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은혜의 스토리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22:6).

위의 구절에서동행하다또는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다는 표현을 두 번씩 반복하여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과 이삭이 한마음을 갖고 이 일을 행하였음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The two of them walked on together"라고 한 영어 성경은 번역하였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행동에 복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발적인  ‘동행이었습니다연합된 마음으로 함께 걷는 걸음이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복종했습니다.

* 2:6-8/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러나 그것은 맹목적인 복종이 아니었습니다. 더 힘센 이의 강압에 못이긴 어쩔 수 없는 복종이 아니었습니다스스로 택하신 자발적인 동행이었습니다.

* 10:17-18/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 18:10-11/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기록으로 7마디의 말씀을 하십니다. 처음 세 마디의 말씀은 아침 9시부터 12시 사이에 하셨습니다. 그리고 12부터 갑자기 온 땅이 어두워지고 3시까지 지속됩니다. 어두움이 가실 때쯤 예수님께서는 네 번째 하신 말씀을 하십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입니다.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당신은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 후에 연거푸 "내가 목마르다"(5 번째), "다 이루었다"(6 번째),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합니다"라고 말씀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왜 나를 버리느냐고 외치는 아들의 외마디에 침묵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죽이려 할 때는 그의 이름을 불러 멈추라 라고 하신 하나님께서는 정작 당신의 아들의 외침에는 침묵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함입니다. 그가 죽어야 우리의 죄값이 치러지기 때문입니다. 그가 죽어야 우리가 살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자발적인 순종은 이미 우리가 살펴보았습니다. 아들의 자발적인 순종과 아버지의 자발적인 내어 주심이 우리를 살게 한 것입니다.

 

 결론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이것은 아들 예수님의 자발적인 순종이 빚어낸 우리를 위한 구원의 드라마입니다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10:9-10)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 어메이징 그레이스입니다.

인간이 신을 위한 제물이 되는 것이 모든 종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신이 인간을 위해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신 분, 그가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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