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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범죄가 주는 교훈

by 소소한행복^^ 2024.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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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으니라"(삼하 11:1)

온 이스라엘 군대가 랍바 성을 에워싸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인 장면으로, 다윗이 범죄하게 된 배경을 제공해 준다. 즉 전시(戰時) 상황이라는 비상 사태에도 불구하고 편안히 예루살렘 궁에 거하던 다윗은 영적 긴장이 플려 결국 밧세바를 범하고 그 남편 우리아를 모살(謀殺)하는 엄청난 죄악에 빠지고 마는 곳이다(2-27절).

골리앗을 무찌르는 다윗, 자신을 이름모를 촌구석 목동의 자리에서 불러내어 왕을 싶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린 다윗은 은혜를 상실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저녁때에 다윗이 그 침상에서 일어나"
다윗이 낮잠을 자고 일어난 사실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물론 이러한 낮잠은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한낮의 더위를 피하기 위한 풍습이긴 하였다(Lange, Pulpit Commentary). 그러나 국가적으로 초긴장 상태에 있던 당시의 상황으로는 용납하기 힘든 자세이다. 즉 다윗은 낮잠을 잘 것이 아니라 쉬지 말고 기도하여야 마땅했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 다윗은 영적으로 나태한 상태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Matthew Henry). 이처럼 나태하고 게으른 자의 낮잠은 비극을 부르기 마련이다(4:5,6). 한편, 여기서 '저녁때'는 늦은 오후를 의미한다(삼상30:17). 랑게(Lange)는 대략 이때를 오후 3시경부터 해가 완전히 어두워진 때까지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잠에서 깬 다윗이 저녁녘에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즐기기 위해 지붕 위를 산책한 것을 가리킨다. 아마도 이는 다윗의 일상적인 습관이었을 것이다(Lange, Pulpit Commentary).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당시 다윗 궁은 높은 시온 산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그 인근 주민의 집 안마당을 잘 내려다 볼 수 있었다.

혹자는 밧세바의 이러한 목욕 행위가 다윗 왕을 유혹하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추측은 고대 근동 지방에서의 주거 형태를 살펴볼 때 지나친 억측이다. 왜냐하면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집 안마당의 우물에서 목욕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그럴 경우 지붕 위에서 이웃집을 내려다 보는 행위는 금기 사항이었기 때문이다(Keil, Patrick Philippson).

따라서 다윗 왕의 간음 사건(3, 4절)은 밧세바의 유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안목의 정욕을 이기지 못한 다윗 자신의 범죄 행위였음을 알 수 있다(Lange, Matthew Henry, Pulpit Commentary).


"다윗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다윗이 점점 더 악의 구렁텅이로 빠지고 있음을 역력히 증거해 주는 구절이다. 즉 처음에 시각적으로 미혹받은 다윗(2절)은 자제력을 상실한 채 밧세바의 신분을 알아보았으며, 마침내는 정욕에 굴복하여 간음을 자행하고 만 것이다(4절). 이는 곧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리라"(약 1:15)는 말씀에 가장 부합되는 경우인 바 '악의 모든 모양이라도 버려야 함'(살전 5:22)을 절감(切感)케 해준다.


"다윗이 데려오게 하고"
다윗의 이러한 행위는 한 가정과 하나님의 율법을 파괴하는 행동으로서, 극형인 사형(死刑)에 해당하는 범죄였다(출 20:17;레 20:10).

출 20: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찌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찌니라

레 20:10/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찌니라


따라서 다윗이 이처럼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의 뜻을 크게 어기는 죄였임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러나 그의 속에서 일어나는 정욕을 다스리지 못하므로 결국 이렇게 엄청난 죄를 저지르게 되었던 것이다(약1:15;렘5:8). 한편, 혹자들은 다윗 왕이 이러한 죄를 쉽게 저지를 수 있었던 하나의 원인으로 밧세바의 방조(幇助)를 지적한다(Keil, Pulpit Commentary, Lange). 즉, 본절에는 다윗의 범죄 행위에 대하여 밧세바가 반항했다고 하는 아무런 언급도 나와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사건의 모든 책임은 다윗에게 있다하더라도 한 남편의 아내(3절)로서 그녀의 태도만은 결코 면책(免責)받을 수없는 것이다(Wycliffe, Keil).


"그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히브리 성격의 원문에 따르면 밧세바(Bath-sheba)가 자신의 부정함을 깨끗케 한 일은 다윗과 동침한 후에 행한 것으로 나와있다. 따라서 본절의 정확한 번역은 '저가 그녀와 동침한 후 그녀는 그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다'이다(RSV. NIV, NASB, Jerusalem Bible). 한편 여기서 밧세바가 '그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다'는 말은 남녀가 서로 동침한 후에는 그 몸을 씻도록 되어 있는 하나님의 율례를 그대로 지킨 것을 의미한다(레 15:18). 이로 보아 밧세바는 다윗과 간음하고서도 그에 대한 참된 회개는 결여한 채 의식적(儀式的)정결에만 신경을 썼던 것 겉다(Pulpit Commentary).


"여인이 잉태하매"
마침내 다윗이 뿌린 죄의 열매가 나타나기 시작했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이처럼 인간이 범한 죄는 자생력(自生力)과 번식력이 강하여 반드시 그 열매를 맺고 만다. 따라서 범죄한 인간마다 그 결과로 인하여 육체적 , 정신적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윗에게 고하여"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면 간음하는 자들은 모두 사형에 처해야만 했다(레 20:10). 따라서 우리아는 이 율법의 규정에 따라 자기 아내를 돌로 쳐서 죽일 것이 틀림 없다. 그러므로 이에 겁이 난 밧세바는 왕의 해결책을 기대하며 그에게 자신이 잉태한 사실을 알렸던 것이다.


"헷 사람 우리아를 내게 보내라"
밧세바가 잉태한 자신의 아이를 마치 우리아의 아이인 것처럼 꾸미기 위한 다윗의 간계(奸計)의 첫 단계이다. 즉 다윗은 우리아와 밧세바를 동침케 함으로서 밧세바의 잉태가 우리아로 말미암은 것처럼 위장하려고 전쟁터에 나가 있던 우리아를 급히 소환한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기에 급급한 다윗의 모습은 그가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에서 완전히 떠났음을 시사해 준다.


"다윗이 어떠한 것을 묻고"
자신의 속사정을 위장하기 위한 다윗의 거짓된 물음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점점 더 죄악을 쌓고 있음을 보게 된다. 즉 처음에 탐욕죄(출 20:17)로부터 시작하여 간음죄(출 20:14)를 범한 그는, 이제 그 죄를 은폐하기 위하여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거짓죄(출 20:16)를 또하나 추가하고 있는 것이다.


"발을 씻으라"
이는 히브리인의 관용적 표현으로 '휴식을 취하라'는 말이다. 즉, 사막 지역인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하루의 일이나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무엇보다 먼저 발을 씻고 휴식을 취했던 것이다(창 18:4;눅 7:44). 그렇지만 여기서 다윗 와의 이러한 배려는 우리아로 하여금 밧세바와 동침케 하려는 간교한 음모에 다름 아니다. 한편, 혹자는 여기에서의 발(feet)은 남성의 성기(性器)를 의미한다고 해석하였다(Hertzberg). 그러나 그것은 우리아와 밧세바와의 동침을 노골적으로 강요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다윗이 자신의 속셈이 뻔히 드러나는 그같은 말을 하였을 리는 만무하다. 그러므로 이 해석은 신빙성이 없다.


"왕의 식물이 뒤따라 가니라
여기서 '식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사트'는 '선사하다', '바치다'는 의미의 '나사'에서 파생된 말로서 선물(膳物)을 의미한다(창 43:34;에 2:18). 따라서 다윗이 우리아에게 특별휴가는 물론 이와 같이 선물까지 수여한 것은 전쟁 영웅에게 베푸는 예우에 해당된다. 그런데 이처럼 다윗이 우리아에게 영웅 대접을 한 것은, 어디까지나 전쟁에서 우리아를 갑자기 소환한 것인 양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기만책에 불과하다.


"왕궁 문에서 잔지라"
여기서 '왕궁문'이란 보다 구체적으로 얘기해 왕궁 문을 지키던 시위병들이 거처하던 숙소(왕상 14:27,28)를 의미한다(Lange, Matthew Henry, Pulpit Commentary). 즉 우리아는 다윗 왕의 호의를 사양하고 왕궁의 시위병들과 함께 밤을 지새운 것이다. 그런데 우리아가 이와 같이 행한 이유는 아마 그의 충성심에서였을 것이다. 즉 그는 자기 혼자서만 집에서 편안히 쉬는 것을 사양할 정도로 자기 직무에 대한 충성심으로 불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다윗과의 대화 가운데서도 발견할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이다(11절). 한편 혹자는 이리하여 왕궁 시위병들과 함께 잠을 잔 우리아는, 그들로부터 밧세바가 다윗의 총애를 받고 궁전에 출입한 소식을 듣게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이는 우리아가 결국 밧세바의 부정(不貞)을 알게 되었다는 주장이다(Matthew Henry). 그러나 다윗에 대한 우라이의 계속된 이러한 주장은 단지 있음직한 추측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혹이 다윗에게 고하여 아니하였나이다"
다윗이 사람을 시켜 우리아를 미행케 했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Lange). 아니면 다윗의 선물을 우리아의 집에 배달해 주었던 자(8절)가 우리아의 부재(不在)사실을 확인하고 다윗에게 일러주었을런지도 모른다.


"언약궤 영채 가운데 유하고 내가 어찌 자리이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전쟁이 곧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이라는 의미에서 종종 언약궤를 동빤하여 전쟁터에 나아갔다(민10:35, 36;14:44;수 3:6). 수 5:13-15 강해, '성전(聖戰) 참조.따라서 우리아의 이와 같은 진술은 '하나님께서도 현재 싸우고 계시거늘 어찌 나같은 존재가 편히 쉴 수 있겠습니까'라는 뜻의 말이다. 아마도 우리아의 이러한 충성된 대답은 평소에는 다윗 왕을 충분히 감동시키고도 남을만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범죄한 다윗에게는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지금 다윗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은폐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 주 요압과 신복들이 바깥 들에 유진하였거늘"
이는 하나님께 대한 간절한 신앙심은 물론 , 한걸음 더 나아가 상관에 대한 우리아의 충성심과 동료에 대한 사랑, 따스한 인간애가 담겨있는 진솔(眞率)한 말이다. 따라서 다윗은 이러한 말을 듣는 중에도 양심에 가책을 받고 회개할 수 있어야 했다. 즉 자신이 우리아와 같은 충직한 신하의 아내를 탐한 것이 얼마나 괴악한 죄악인지를 깨닫고 이제라도 그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회개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죄에 사로잡혀 올바른 판단력을 상실한 다윗은 그러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는 우리아와 밧세바를 동침시키려는 계락이 수포로 돌아가자 급기야 그토록 충성스런 우리아를 살해까지 하고 만다(12-25절). 이는 기어이 파괴적인 결말을 가져 오고야 마는 죄의 특성(약 1:15)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비극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왕의 사심과 왕의 혼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여기서 '왕의 사심'과 '왕의 혼의 사심'은 사실 다윗의 전인격과 존재를 가리키는 동일한 말이다. 그런데 우리아가 이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여 맹세한 것은 자신의 굳은 결심을 다윗 왕에게 확고하게 보이고자 함이었음이 분명하다(Lange, Baker Commentary). 한편, 여기서우리아가 '여호와의 사심'이나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않고 '왕의 사심'으로 맹세한 것은 그당시 히브리인들의 관습에 따른 것이었다. 즉 히브리인들은 대개 자신보다 낮은 계층의 사람에게는 '여호와의 사심'이나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 했으나(4:9;12:5;삿 8:19;룻 3:13;삼상 14:39;왕하 2:2, 6), 자신과 동등한 계층이나 자신보다 높은 계층의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의 이름으로 맹세하였던 것이다(삼상2:26;17:55;20:3;왕하2:2,4,6;4:30).


"오늘도 여기 있으라" 본절로부터 14절을 읽어 보면, 다윗이 '내일은내가 너를 보내리라'한 본절의 약속을 어기고 우리아를 하루 더 묵게 한 것처럼 보인다. 그 이유는 하반부에 언급된 '이튿날'에 다윗이 우리아를 궁정으로 불러들여 저녁까지 술레 취하게 하는 장면(13절)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에 우리아를 되돌려 보낸것처럼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14절). 그러나 실상 13절의기록은 본절의 '그 날에 예루살렘에 유하니라'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다. 그리고 14절은 본절의 '이튿날'에 있은 일에 대한 설명이다. 이처럼 히브리인들은 한 사건을 기술함에 있어서 중복적(重複的)인 표현을 곧잘 사용한다. 즉, 그들은 처음 구절에서는 한사건에 대해 간결히 진술한 다음 구절에서 그 사건을 보다 상세히 기술하는 점진적,중복적 표현법을 즐겨 사용하였다(4:7 주석 참조). 결론적으로 다시 한번 언급하자면13, 14절은 본절의 간결한 기술에 대한 보다 상세한 설명 구절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사실을 좀더 명확히 이해하려면 본절의 '이튿날'이란 말 다음에 '우리아가 예루살렘을떠나 전쟁터로 되돌아가니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취하게 하니"
다윗이 사람의 정신을 혼란케 하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술의 힘을 빌어 우리아의 성적(性的) 충동을 유발시키려 한 것을 가리킨다. 이는 자신의 악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다윗의 비열한 행동이다. 우리는 여기서 지금껏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양심과 고결함을 잃지 않았던 다윗(1:14-16;4:5-12;6:21;삼상24:4-7;26:6-12) 조차도 순간적으로 가장 비열하게 만드는 죄의 놀라운 영향력을 발견할 수 있다.다윗이 편지를 우리아의 손에 부쳐 - 우리아는 자신의 죽음을 재촉하는 편지(15절)를 자신이 배달하리라고는 전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바로 이같은 사실을 역이용, 우리아를 죽이는 도구를 이용하였다. 이는 사전에 치밀히 계산하지 아니하고서는 도저히 생각해 낼 수 없는 교묘함이었다. 따라서 바로 여기에 다윗의 배가(倍加)된 가증스러움과 사악함이 담겨 있는 것이다(Matthew Henry's Commentary, Vol. , p. 498).


"너희가 우리아를 죽게 하라"
우리아는 다윗의 37인 용사 중 한 사람이었다(23:39). 따라서 그가 일단 싸움에 임하면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다윗은 바로 이런 점을 이용하여 우리아를 전쟁의 선봉장(先鋒將)이 되게 하여 전사(戰死)당하도록 꾀하였던 것이다. 아무튼 다윗은 일단 우리아를 제거하기만 하면 자신의 부정 행위(4절)가 영원히 감추어지고, 또한 밧세바까지도 자신의 아내로 삼을 수 있을 것(27절)이라는 생각 하에 이같은 죄악을 저질렀을 것이다(Matthew Henry's Commentary, Vol. , p.497).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죄악을 반드시 적발해 내시므로(합 1:13) 다윗의 죄악 역시 결국 낱낱이 드러나고 말지 않았는가(12:1-23)! 요압이 그 성을 살펴 - 여기서 '살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마르'는 본래 '방어하다', '경계하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혹자는 이를 '성을 포위하여 경계하다'라는 의미로 해석한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이 말이 이러한 뜻으로 사용된 용례는 거의 없다. 오히려 이 용어는 대개 '관찰하다', '유의하여 감시하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삼상1:12;시 59:10;사42:20;창 2;15). 따라서 이 말은 다윗의 분부를 받은 요압(15절)이 우리아를 적군의 손에 주도록 하기 위해 사전에 그 적절한 장소를 물색한 것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L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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