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6편(설교_초안)
간밤을 한숨 못 자고 눈물로 지새운 듯한 시인의 깊은 절망이 이 시를 압도하며 읽는 이의 마음을 때립니다.
"(시 6:6)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어떤 이들은 이 시가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고 생각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진정으로 깊은 좌절의 골짜기를 지나가 본 사람이라면, 시인의 이러한 심정을 이해하며 그가 밤마다 눈물로 침대 커버를 적시는 심정이 마음에 와 닿음을 느낄 것입니다.
그의 이런 슬픔이 하루 이틀이 아닌 상당한 기간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밤마다 눈물로 내 요를 적시나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감당할 수 없는 깊은 절망과 슬픔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그 절망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신 결과라고 느껴진다면 그 절망은 우리에게 죽음과도 같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적의를 품고 있다는 사실이 시인에게는 하나님의 분노하심으로 벌을 내리신 것과 같다고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그의 심정은 마치 무덤에 내려온 것 같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절망이었습니다. 5절에서 우리는 시인의 그러한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망 중에서 ... 음부에서" 시인은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4절에서 그는 "여호와여 돌아와"라고 절규합니다. 하나님은 그를 떠났습니다. 그와 함께 하는 자들은 오직 그를 삼키려는 절망과 사망을 가지고 달려드는 원수들뿐입니다. "행악하는 너희는 모두 나를 떠나라"라는 8절의 표현에서 시인의 그러한 상황을 조금은 느낄 수 있습니다.
시인이 느끼는 고통은 하나님의 진노(1절)와 하나님의 부재(4절)입니다. 하나님의 부재는 원수의 득실거림의 원인이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부재를 더욱 크게 느끼게 하는 원인이 원수의 득세일 것입니다.
시인의 이러한 상황을 생각할 때에 떠오르는 영상이 있습니다. 마치 부모에게 버림받은 어린아이가 깡패와 소매치기가 득실거리는 밤거리를 울면서 헤매고 있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건달들은 그를 향하여서 "부모에게 버림받은 자", "저주받은 인생"이라고 놀립니다. 살 소망이 끊어졌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의 부모가 그를 버렸다면, 그에게 살아갈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있다면 그를 버린 부모를 찾아 복수하겠다는 한가지 이유가 있다면 모를까요?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느낌만큼 우리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그러나 무덤에도 소망은 있습니다. 시인은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깊은 절망의 밤(골짜기)에도 소망의 태양은 떠오르며, 아침은 찾아옵니다. 바로 회개와 기도가 아침을 여는 밤하늘의 샛별과도 같습니다.
시인은 서두의 부르짖음에서 하나님께 분노로 징계하심을 그치라고 간청합니다.
"(시 6:1) 주님, 내게 노하지 마십시오. 진노하지 마십시오. 나를 징계하지 마십시오." (HSN)
만약 하나님의 진노가 계속된다면 시인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시인은 몸과 마음을 모두 앓고 있습니다. 그의 몸은 수척하였고, 그는 뼈가 떨릴 정도로 온몸이 심한 고통으로 파괴되었습니다.
(시 6:2)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개역)
그리고 그의 영혼도 아픕니다.
(시 6:3)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그러나 그는 치료자를 알고 있다. 그의 수척한 몸을 살찌게 하고 그의 떨리는 뼈를 잡아줄 분을 알고 있고, 그의 아픈 영혼을 만져 주실 분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분은 긍휼이 많으신 분임을 시인은 알고 있다.
그분은 다름 아닌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 시인은 1절부터 3절까지 "여호와여"를 네 번에 걸쳐 부르고 있습니다.
3절의 "어느 때까지니이까?"라는 질문은 하나님의 긍휼을 간절히 사모하며 그의 도움이 없으면 그의 아픔이 그를 삼킬 것이라는 애절한 간구가 담겨 있는 듯합니다.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4절입니다. "여호와여 돌아와" 그의 치료자가 돌아오시면 그는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의 구원은 여호와께 있습니다. 그가 여호와께 돌아오면 여호와는 그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영혼을 사망의 수렁에서 건지시며, 그를 깊은 절망에서 구원하실 것입니다.
시인은 크게 두가지 면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치료하시고 구원하실 것을 믿습니다.
첫째는,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주님께서는 그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인에게 과거에 그에게 신실하고 풍성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본 시를 쓴 사람은 다윗입니다. 다윗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하여 구원을 간청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기도할 때 그분의 성품을 근거로 하여 간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에 호소하는 것이기에 그 기도는 역사 하심이 큽니다. 다윗이 의지하는 하나님의 성품은 "인자"였습니다. 우리가 시편 5편에서 살펴보았듯이 인자란,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에 근거하여 구원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의 구원은 국가적인 구원이든 개인적인 구원이든 항상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에 근거하여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과 충성의 맹세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충성의 약속을 신실하시게 지키실 것입니다(인자는 상급자가 하급자를 향한 충성의 사랑이다).
깊은 절망 가운데 있습니까?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그 성품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둘째는, 시인이 여호와께 돌아오라고 간구하는 근거는 "음부에서는 감사를 드릴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시 6:5)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시 6:5) "죽어서는, 아무도 주님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스올에서 누가 주님을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가 깊은 절망과 질병으로 인하여 죽게 된다면, 그를 절망 가운데서 구원하시고 심한 육신의 질병과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도움을 인하여 깊은 어두움의 밤을 지나 그의 마음에 새벽의 여명이 밝아 올 때에 자신을 새벽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해달고 기도합니다. 시인은 그의 마지막 원수인 사망에서 여호와께서 구원해 주시면, 구원의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것이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도 기도할 때 기도의 응답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도 응답을 기다리는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를 깊은 절망에서 어려움에서 건지소서. 내가 이 극심한 고통에서 건지신 여호와를 찬양하기 원합니다. 나의 찬양이 불려질 수 있도록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구원의 노래를 원수와 사람들 앞에 부르고 나의 구원자가 살아 계심을 높이겠나이다." 우리의 기도가 이래야 할 줄 압니다.
나의 슬픔을 보시옵소서
시인은 그제 그의 사정을 주님께 그려주고 있습니다. 6-7절입니다.
(시 6:6)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그의 젖은 눈과 젖은 요를 보라고 말합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이는 탄식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그는 깊은 탄식에 완전히 탈진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온몸에 힘이 빠지고 살 소망이 끊어진 것입니다. 이는 다윗이 죄로 인해 얼마나 심각하게 고민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 이 '눈물'은 고통을 이기지 못해 나오는 눈물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론 하나님이 자기를 떠나 계신다는 슬픔으로 인해 나오는 눈물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많은 눈물은 그의 육체적, 영적인 상처가 얼마나 깊은 것이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탄식과 눈물은 끝내 그의 눈의 시력을 흐리게 하였습니다.
(시 6:7)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
이 부분을 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시 6:7) 사무친 울화로, 내 눈은 시력까지 흐려지고, 대적들 등쌀에 하도 울어서 눈이 침침합니다.(새번역)
내 눈이...쇠하며...어두웠나이다 - 눈은 건강을 측정하는 척도가 된다. 모세는 죽기 전에 그의 눈이 쇠하지 아니하였는데(신 34:7), 이는 그가 12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건강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 구절은 다윗이 극도로 쇠약해진 자신의 건강을 하나님께 호소하는 구절이다.
그리고 그의 시력이 흐려진 것은 그의 눈물뿐만이 아니라 "그를 괴롭히는 대적의 등살"이었습니다. 시인이 분개할 정도로 대적은 시인을 향하여 악한 말을 하며 그를 못살게 굴었습니다. 구약 시대에 병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죄인으로 간주되었고 따라서 사람들은 병자를 적대시하였습니다. 심지어 친구들까지 적대시하였다(욥 30:1-15). 다윗은 이러한 의미에서의 대적으로 인하여 분개하게 되었고, 또한 이로 인해 그 눈이 어둡게 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다윗이 죽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8-10절). 그의 아들들마다 왕위 계승을 놓고 암투를 벌일 조짐이 있었으며(삼하 15:6; 왕하 1:5), 각 아들마다 지지자들을 두고 있었습니다.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가 망하기를 바라는 원수가 잇습니다. 아니 그러한 사람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연약한 순간에 스스로 그리스도인의 자격이 없다는 자괴심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사전에서는 '좌절'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자기는 자격이 없고, 잘 될 희망도 없다는 느낌을 포함한 정서 행위로서, 때로 생활 전반에 걸쳐 정신적 육체적 활동의 침체가 따른다".
회복에 대한 확신
그러나 시인은 그가 의뢰하는 인애의 하나님께서 그를 회복하시고 치료하실 것을 확신하며 깊은 절망의 밤을 지나 새벽의 찬란함 가운데 서있습니다.
시인은 그를 괴롭히는 원수들을 향하여 당당히 떠나라고 명령합니다.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8절) 그가 원수를 향하여 이렇게 당당히 외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다 들으셨다'라고 말합니다.
(시 6:8)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시 6:9)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우리도 기도할 때에 이러한 확신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심을 확신하고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문제를 향하여 당당히 떠나라고 명령해야 합니다. 우리가 비록 범죄해서 징계로 오는 고통이라 해도 우리가 회개함으로 주님께 돌아오면 주님이 우리에게 돌아옴을 확신하고 우리의 간구에 들으시는 여호와의 신실하신 사랑에 근거하여 당당히 외쳐야 합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원수와 문제를 향해... 그것이 사망이라 할지라도...
이제 시인은 그의 기도를 마치면서 끝까지 자기의 원수가 되기를 고집하는 모든 원수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시 6:10)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홀연히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시인은 자기가 그들로 인하여 느낀 실망과 부끄러움이 도로 그들에게 임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나가는 글
오늘 우리는 시6편을 통해서 육신과 마음과 사회적으로 크게 고통 가운데 절망의 밤을 지내고있는 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의 슬픔의 더 큰 원인은 하나님의 진노(1절)와 하나님의 부재(4절)였음을 보게 됩니다. 아니 하나님의 진노와 부재로 그가 수척하며, 그의 뼈가 떨리고, 그의 영혼 마저도 심히 떨림을 봅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원수들의 등살로 그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저주받은 삶이라는 조롱으로 고립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의 신실하신 풍성한 사랑에, 즉 하나님의 성품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함을 봅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믿으며 그 구원의 노래를 기쁘게 부르기를 소망함으로써 회복되는 시인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는 곳은 오직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넓으신 품 안입니다. 그를 신뢰함은 절망이 변하여 찬양이 되게 합니다.
여호와 그는 치료자이십니다. 그는 구원자이시며 우리를 회복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분으로 인해 모든 아픔을 치유받고 절망의 깊은 밤을 지나 여명이 비춰오는 새벽을 향해 힘차게 자유와 회복의 양 날개를 펼치며 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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