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시편 3편 / 배경 구절: 삼하 15:1~18:33
들어가는 말
우리는 이 시를 쓴 시인이 극한 상황 가운데 서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1절에서 시인은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 지요”라고 말합니다. ‘어찌/라는 말은 시인의 위기와 피할 수 없는 고통의 심각성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 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많은 사람이’ 라고 말하는 것을 통해 시인이 겪는 고난은 다수를 통한 고통, 또는 커다란 위기 상황 가운데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시인이 당한 어려움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시인은 대적에게 쫓기고 있습니다. 그 대적은 숫자적으로 많으며, 적극적으로 시인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는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그리고 대적들은 시인을 향하여서 비열하게 조롱을 퍼 붇고 있습니다. 원수의 조롱을 들어봅시다. 2절에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라고 조롱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를 지은 시인은 다윗입니다. 바로 이시는 다윗이 그의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으로부터 배반을 당하여 예루살렘에서 도망가면서 자신의 심정을 노래한 시입니다. 여러분은 시편 3편의 첫머리에“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 지은 시”라는 표제를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배반당한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눠준 아들이 자신을 향하여서 칼을 들고 죽이려고 달려온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하겠습니까? “그 심정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라는 말이 어쩌면 가장 옳은 표현 일 것입니다. 더군다나 자신이 사랑했던 백성 중에 많은 사람이 그 반역에 가담했습니다.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 비해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한 자가 훨씬 많았습니다. 왕으로서의 자신의 백성에게 버림받는 마음도 아들에게 버림받는 마음만큼은 못하겠지만 커다란 아픔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더욱 아프게 하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자들은 목소리를 높여서 자신을 비방합니다. 그 비방의 내용이 다름 아닌 자신이 평생토록 의지하고 바라본 하나님의 도움에서 제외되었다는 조롱입니다. 이것이 그를 더욱 아프게 했을 것입니다. 다른 것은 참아도 자신의 중심을 왜곡하고 비방하는 것은 시인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주었을 것입니다. 신앙인에게 가장 힘든 순간이 우리의 순수한 신앙을 비방하는 수군거림과 이런 말이 아닐까 합니다. 누군가, 어려움을 당하는 여러분에 대해 사람들이 수근거리는 말이 “저 사람은 하나님께 버림받고,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는 자”라고 한다면 여러분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특히 교회에서 그런 비방의 말을 듣는 다면 아마 신앙마저 버리고 싶을 것입니다. 다윗이 바로 그러한 상황에 처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러한 무거운 절망과 고통을 믿음으로 반전시키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이런 상황에서 시인은 어떻게 상황을 반전시키고 있을까요?
첫째, 하나님께 나아 감
본 시는 “여호와여”라고 하며 기도로 시작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쉬운 것 같지만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어려움이 닥치면 먼저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기 쉽고 사람에게 하소연하기 쉽습니다. 기도하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고 낙심하고 절망 가운데 주저 앉아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하나님께 우리는 우리의 사정을 있는 그대로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시인을 보십시오. 그는 마치 그림을 그리듯이 어려운 상황을 그대로 하나님께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 지요, 일어나 나를 치려하는 자가 많습니다.”라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그대로 묘사합니다. 시인은 마치 어린아이가 자신의 아빠에게 하듯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습니다. 시인이 얼마나 정직하고 순수하게 자신의 사정을 하나님께 묘사하는지는 그가 옮긴 원수들의 말속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 많은 사람이 나를 가리켜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 다윗은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라고 나에게 말합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밖에서 사람들에게 거짓된 말을 듣고 와서는 ”아빠, 인중이가 나보고 <<니네 아빠는 너를 하나도 사랑안해.>> 이렇게 얘기해요” 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기도는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히스기아 왕에게 편지를 보내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조롱할 때, 히스기야 왕이 드린 기도를 생각나게 합니다. ”히스기야가 사자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보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 놓고 그 앞에서 기도하여 가로되 그룹들 위에 게신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천하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조성하셨나이다.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사신 하나님을 훼방하여 보낸 말을 들으시옵소서.”(왕하 19:14~16)
여러분의 상황이 어렵습니까? 환경이 여러분을 향하여 치려고 일어납니까?
환경이 여러분을 향하여 치려고 일어납니까? 여러분의 순수한 신앙이 비난받습니까? 여러분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거짓을 말합니까? 낙심하지 마시고 여러분의 좋으신 아빠께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십시오. 있는 상황을 그대로 그림을 그려 주십시오. 필요하다면 어린아이의 입으로 나아가십시오. 주님 들어주실 것입니다. “내가 안다” 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 마음도 너와 같이 아프구나” 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둘째, 진리로 마음을 지킴(스프링 보도를 만듦)
시인은 이러한 어려운 상황을 하나님께서 변화시킬 때 까지만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상황은 여전히 어렵지만 시인의 마음에서는 벌써 상황이 역전되고 있습니다. 그는 주도적인 믿음으로 자신의 상황을 반전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개혁 성경에는 없지만, 3절의 “여호와여” 라는 호칭 앞에 “그러나” 라는 용어가 원어에는 있습니다. 즉 3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여...” 라고 시작합니다. 시인의 상황은 어렵지만 시인의 마음에는 “그러나” 라는 ‘스프링 보도’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상황은 어렵지만, 나는 여호와로 인해 ‘그러나’ 나는 도약한다”라는 신앙 고백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마음에 진리를 선포함으로써 이런 어려운 상황에 ‘그러나’ 라는 스프링 보도를 마련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수들은 다윗에게 ‘너는 하나님의 도움을 얻지 못한다’라는 거짓말을 말하지만 다윗은 오히려 자신은 하나님께 도움을 받고있다고 진리를 말합니다. 그 도움이 무엇입니까? 시인은 크게 세 가지의 도움을 말합니다.
? 주는 나의 방패입니다. 여기서 방패란 단지 한 면 만을 막아주는 방패가 아니라, 모든 면을 막아주는 방패를 의미합니다. 방패라는 말 앞에 실제로 원어에는 ‘둘러싼’이란 형용사가 붙어있습니다. 우리는 6절에서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겠다’라는 다윗의 신앙을 봅니다. 천만의 원수가 그를 죽이려고 사방으로 겹겹이 우겨 싸도 여호와께서 그의 방패가 되셔서 다윗을 모든 방향에서 지키실 것이라는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는 환란 당하는 그의 백성의 사방으로 두르는 방패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의 친 백성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환란 당할 때 주님은 우리 가운데 방패로 임재하십니다. 주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는 임마누엘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도움이십니다. 그는 방패이십니다.
저는 이 장면을 묵상하면서 아람 군대가 엘리야를 죽이려고 도단을 에워쌌을 때의 장면을 생각했습니다. 아침에 일찍 엘리야의 사환 게하시가 성밖을 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싸고있는 모습을 보고 ‘아아, 우리가 어찌하리이까’라고 탄식합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믿음으로 그를 돕는 여호와의 군대를 보고 편안해합니다. 엘리야가 게하시를 위해 눈을 열어줄 것을 기도하자 게하시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불 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 6:17). 그렇습니다. 여호와는 우리의 방패십니다. 원수보다 더 많고 힘있는 군대를 거느리고 계신분이 우리 도움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원수들은 다윗을 향하여서 ‘하나님의 도움을 얻지 못한다’고 하나, 다윗은 “주는 나의 영광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내가 비록 비참하게 되어 쫓기는 신세가 되었고 나의 명예와 영광이 땅에 떨어졌지만, 나의 영광은 여호와이시다”라고 말합니다. “여호와는 내게 영광의 면류관을 다시 씌우실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광이십니다. 우리의 떨어진 자존감을 세워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추락하는 영광에 날개를 달아 주실 것입니다.
원수들은 다윗을 향하여서 ‘하나님의 도움을 얻지 못한다’고 하나, 다윗은 “주는 나의 머리를 들어주는 도움이시다.” 라고 말합니다. 머리 숙인 왕, 천하를 호령하던 그 앞에 모든 사람이 머리를 숙였는데 이제 그가 반역자 앞에 머리를 들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머리를 들어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깊은 절망감 때문에 머리를 들지 못하는 분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의 머리는 환경으로 인해, 원수의 말로 인해 고개 숙인 남자는 아닙니까? 아니면 고개 숙인 여자는?
여러분의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여러분이 여러분의 마음만 지킨다면, 우리는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라는 발판을 사용하십시오. 그것은 진리를 말하므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진리를 여러분의 마음에 선포하십시오. 왜냐하면 사탄이 우리의 환경을 공격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정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의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여러분의 마음의 영토가 진리로 무장되어 있으면 여러분을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마음의 영토가 적의 수중에 있다면 여러분의 환경도 곧 적의 수중에 있게 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원수는 여러분의 환경을 마음대로 지배할 지 몰라도, 여러분의 마음만큼은 여러분이 허락하지 않으면 절대로 지배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여러분이 어떠한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깊은 절망 가운데 빠질 수도 있고 반대로 어려운 환경 가운데도 주님을 바라봄으로 소망가운데 거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남매 집에 갔을 때 마르다는 많은 일로 마음이 분주하고 바빴습니다. 그러자 예수님 발아래서 말씀을 듣는 동상이 얄미웠고, 그것을 내버려두는 예수님에게도 불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예수님께, 자신의 바쁨을 돌아보지 않는 동생을 꾸짖어 달라고 조종하려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한 가지만 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10: 41~42)
욥을 기억하십시오. 사탄이 욥을 공격했습니다. 무엇으로 공격했습니까? 그의 환경을 공격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서 하루아침에 욥의 10자녀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모든 소유를 빼앗아 갔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그의 몸에도 공격을 하였습니다. 그가 온몸에 악창을 냈습니다. 그래도 욥의 마음이 영토를 빼앗을 수 없던 사탄은 그의 아내의 입을 빌어서 욥을 조롱하고 저주합니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겠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 그러나 끝내 욥은 그의 마음을 지켰습니다. 사탄은 욥의 환경을 무너뜨렸지만 욥이 허락하지 않는 욥의 마음의 영토만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욥은 그의 아내의 말이 그의 마음을 주장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욥은 원수의 거짓말이 그를 주장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욥은 진리를 말함으로 거짓으로부터 자신의 마음을 지켰습니다. 욥이 어떤 진리를 말했습니까?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은 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욥 2:10) 원수가 여러분의 환경과 거짓을 말함으로 여러분을 공격할 때 여러분은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진리를 선포하십시오. 마음 가운데 진리를 말하십시오 그러면,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케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에 수없이 흐르는 생각가운데서 진리가 아닌 것은 어떤 달콤한 말일지라도 거짓으로 아시기 바랍니다. 즉 하나님의 성품에 반대되는 것, 성경의 말씀과 상치되는 것은 원수가 덧 뿌리는 가리지요, 우리의 마음의 영토를 정복하기 위한 ‘트로이의 목마’로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극심한 어려움 가운데 처할 때 먼저 할 일은 여러분의 마음의 영토를 진리로 막아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미 역전의 스프링보드를 마련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나느니라.”(잠 4:23)
셋째,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주께서 마음(심지)이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사 26:3)” 우리가 거짓으로부터 마음을 지키면 우리 마음 가운데 평안이 찾아옵니다. 태풍으로 온 천하가 비바람과 천둥으로 요란하고 전신 없어도 태풍의 눈은 고요한 것과 같습니다.
시인이 마음의 영토를 지켜 평안을 누리게 되자 그는 그 결과 편히 잘 수 있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이런 상황에서 다윗은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평안히 자고 깨었습니다. 그는 단점을 잔 것입니다. 이런 여유와 평안이 어디서 왔습니까? 그의 마음을 지킨 결과입니다. 우리는 어려운 일이 닥치면 그날부터 우리는 잠을 뒤척일 것입니다. 아마 그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잠을 못 자고 깜한밤을 하얗게 지새울 것입니다. 불면증은 염려와 근심이 원인이 될 때가 많습니다. 마음에 여러 가지 생각이 가득할 때 우리는 쉽게 잠을 못 잡니다. 잠을 자도 깊게 못 자고, 꿈이 많습니다. 그것도 개꿈.... 이것은 그가 이미 마음의 상당부분을 원수에게 빼앗겼다는 증거입니다. 다윗이 편안히 잘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수면제를 먹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가 그의 마음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의 생각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을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눈동자와 같이 지키실 것은 그는 믿었기 때문에 밤새 안녕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가운데서도 지키십니다. “내가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라” 그분이 여러분을 붙드십니다. 걱정을 그분께 내려놓으십시오. 무거운 짐을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 위로 던지십시오. 십자가위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는 품으로 거기에 달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여러분의 모든 무거운 짐과 저주, 죄를 짊어지시기 위해 거기에 달리셨습니다. 여러분의 무거운 짐을 그분께 내려놓으면 되는 것입니다. 미안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 기뻐하십니다. 죄스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이 여러분에게 쉼을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어깨에서 모든 무겁고 지기 힘든 짐을 가져다 당신의 어깨에 지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세상이 알 수도 없고 받을 수도 없는 평안을 주십니다. 그분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십시오. 그리고 쉼을 누리십시오. 걱정 뚝, 이제 편안히 주무십시오.
넷째, 과거를 기억했습니다(그 시절 그 때를 아십니까)
7절을 읽읍시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시었나이다”
1절에서 시인은 많은 원수가 자기를 죽이려고 “일어났다” 고 합니다. 7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향하여서 “일어나소서” 라고 말합니다. “주님, 원수가 나를 죽이려고 일어납습니다. 주님, 이제 나를 위해 일어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다윗이 그렇게 외칠 수 있었을까요? 7절 하반 절을 잘 보십시오.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실 것이며 악인의 이를 꺾으실 것입니다.” 라고 <미래형>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뺨을 치셨고, 꺾으시었나이다” 라고 <완료형>을 씁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시인은 과거의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하며, 과거에 나를 도우신 하나님은 오늘 나를 도우시며, 앞으로도 도우신 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포입니다. 다윗이 목동시절 사자나 이리 때의 이빨로부터 그를 구원하신 하나님, 골리앗의 창과 칼로부터 그를 구원하신 하나님, 사울의 핍박으로부터 그를 구원하신 하나님, 수많은 전쟁에서 적의 불화살과 칼로부터 그를 구원하신 하나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고, 그들의 이를 꺾으신 하나님께서 이제도 도우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려우십니까? 여러분의 과거를 돌이켜 보십시오. 과거에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았습니까? 한번 회상해 보십시오. 우리의 망각의 창고에 넣어져 먼지가 뽀얗게 쌓인 과거의 하나님의 도움을 다시 꺼내 보십시오. 혹시 빛 바랜 흑백 사진처럼 하나님의 도움이 잊어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그 시절 그 때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도움을 꺼내어 다시 활동 사진을 돌립시다. 과거의 하나님의 도움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이제도 도우시고 앞으로도 도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일어섭시다.
다섯째, 긍휼을 가진 마음
8절을 읽어봅시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백성에게 내리소서.” 다윗의 마지막 기도입니다. 누구를 위해 기도합니까? “주의 백성”에게 복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여기서 “주의 백성”이 누구를 가리킵니까? 저는 처음에 다윗 자신을 가리키는지 알았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연구해보니, 다윗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임을 알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백성을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그 백성이 자신을 향하여 배반하지 않은 사람만 가리키는지 아니면, 자신에게 배반의 칼을 든 백성들도 지칭하는지 본문을 통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평소 성품으로 보아, 반역자들을 위해서도 간 구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왕의 모습을 봅니다. 자신을 향하여 칼을 들이대는 사람을 위해 축복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빠의 마음을 가지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단지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고 너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복을 빌라”라는 성경 구절을 알고 있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닮을 때 가능합니다. 성령의 성품을 가질 때 드릴 수 있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이 기도를 갈보리 십자가 언덕의 십자가위에서 듣습니다. 자기를 십자에 못박고 조롱하는 그들을 위해 주님은 이렇게 아버지께 중보합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죄인들을 위하여 주님 이 땅에 낮고 낮은 모습으로 오셨지만, 어두움 가운데 빛으로 왔지만 사람들 빛을 싫어하고 그를 거부하고 끝내 죽였습니다. 그러나 주님 끝까지 그들을 사랑하시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다윗이 이 마음을 가졌습니다. 어려움을 이기는 힘은 원수를 향하여 긍휼한 마음을 가질 때 가능합니다. 여러분을 어렵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는 어쩌면 여러분의 기도가 필요한 죄인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중보 기도를 통해 고치고 싶은 상처 있는 사람인지 모릅니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그를 위해 중보하십시오.
나가는 말
여러분이 환난을 만나고, 원수가 조롱할 때, 기억하십시오.
먼저 있는 모습 그대로 아빠께 나아가십시오. 여호와는 우리의 아빠십니다. 무엇을 주저하고 숨기겠습니까!!!
그리고, 먼저, 여러분의 마음을 진리로 지키십시오. 마음에 역전의 스프링보드를 만드십시오. 그는 우리의 도움이십니다. 우리가 환난날에 만날 큰 도움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붙드십니다. 모든 염려를 맡기고 평안히 주무십시오.
그리고, 과거에 여러분을 도우신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여호와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그에게는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으십니다.
아버지의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중보하십시오. 여러분을 힘들게 하는 사람은 여러분보다 더 큰 문제를 가지고 있고, 치유가 필요한 사람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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