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막 1:9)
1. 그 때에-전환점
'그때에', 이 말에 대한 문자대로의 번역은 '그 날들에'이다. 이는 분명한 시기 곧 앞에서 계속 언급되어왔던 세례 요한의 회개에의 세례 사역이 박진감 넘치게 진행되고 있던 그 기간을 지칭한다. 더욱이 이 표현은 역사상에 위대한 한 사건이 나타날 것이라는 데 주의를 끌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즉 유대 백성들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세례 요한의 사역이 진행되고 있던 때라는 배경적 설명을 한다는 것은 적어도그 배경적인 내용보다 더 중요하고 심대한 사건이나 인물의 등장을 암시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사실 당시 세례 요한이 예고하고 그 권위를 더 높이고 있었던 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 곧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실로 예수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30여년 동안 개인적인 삶을 사신 것을 청산하시고 이제 곧 공생애의 삶을 시작하시는 시기를 맞고 계셨다. 사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도래를 준비하고 있는 세례 요한의 사역에관해 익히 알고 계셨지만 그 즉시 오시지 않고 그의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시작하실 바로 '그 때'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예고해 주는 장중한 포고령이요 대서사시의 서곡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말이다.
2. 세례받으심으로 전환점을 만드심
이 단어의 원형 '세례를 주다'(밥티조)라는 말은 '물에 잠그다'(70인역-왕하 5:14; 시 68:23), '물로 씻는다'(7:4;눅 11:38;딛 3:5)등의 뜻으로도 사용되었다. 이상과 같은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이 단어는 '세례'혹은 '침례'로도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이 세례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측면에서는 '물에 잠그다'는 침례적인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고, 구약 율법의 제사 제도에서 볼 수 있듯이 속죄를 위한 뿌림(레 14:7;16:14,15)등의 관점에서(민 8:7) 정결례로 볼 때는 '물로 씻는다'는 세례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상에서처럼 세례와 침례의 효력과 그 중요성은 거의 같은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문제는 세례 혹은 침례라는 그 외적 형식의 절대화를 주장하는 데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의식이 의도하고 있는 바 구원의 확신과 그 이후 변화된 삶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그 중심을 떠난 의식만을 제기한다는 것은 사변적인 논쟁에 빠질 우려가 있다.
3. 하늘의 즉각적인 증거
곧(유뒤스, εὐθὺς), '곧바로', '당장에'라는 긴급성을 강조한 부사로서 이 부사를 자주 사용하는 것이 마가의 복음서가 지니는 한 특징인데(약 41회). 이 단어는 마가의 복음서 전반에 걸쳐 박진감을 더해 준다. 물에서 올라오실새 - '...에서'를 뜻하는 원어 '아포(ἀπὸ)'는 '완전히 잠긴 물속에서부터'라는 의미이기 보다 오히려 신체 어느 부분에 적용되는 단지 '물 안에서' 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이 말은 예수의 세례의 형식(세례, 침례)에 관심을 둔 것이기 보다 세례 예식이 모두 종결되고 예수께서 육지로 발을 내디디시는 순간을 강조하는 말로 볼 수 있다.
마가의 보고에 따르면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오시는' 장면을 본 사람이 오직 예수뿐이었다는 암시를 주고 있는데, 이는 마가의 초점이 예수의 경험을 기록한 것이지 요한에 대해 말하려 함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여기서 마가는 하늘에서 일어난 현상에 대해 '하늘이 갈라지다'(스키조, σχίζω '찢다'는 뜻)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마가의 생동감 넘치는 기록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마태와 누가는 매우 차분한 용어인 '아노이고'('열다')를 사용하고 있다. 어쨌든 하늘이 갈라진다는 것은 인류가 대우주적 전기(轉期)를 맞았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즉 이제 인류는 절망의 하늘을 '찢고' 새 소망을 선사하시는 그리스도를 공적으로 영접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이 표현은 사 64:1의 '원컨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의 앞에서 산들로 진동하기를'을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3. 성령의 기름부으심
"성령이 비둘기같이...내려오심을"
초대 교회 이단자들은 영원한 그리스도가 인간 예수에게 인격적으로 잠시 거하기 위해 내려오신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하여 본 사건을 그 논거로 채택하였다(요일 4:1-6, 주제 강해 '영지 주의'). 후에도 성서 비평가들은 예수의 영원한 신성(神性)과 더불어 예수의 역사적인 성육신(Incanation)을 지지하는 전통적인 견해를 반박하기 위하여 이들의 견해를 인용하곤 하였다.그들은 한결같이 예수 세례시에 그에게 성령께서 내려오셨다가 그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 가실 때 성령께서 떠나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니고 계신 영원한 그리스도에게 본문에서 특별히 가시적으로 성령이 임하신 것은 대신지자로서의 권위와 직무의 전달에 대한 객관적이고 공식적인 확증에 지나지 않는다. 누가는 성령께서 예수에게 임하신 것은 요한의 세례를 통하여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복종과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밝히고 있다(눅 3:21). 한편 본문에서 성령은 '비둘기같이' 임하셨다고 했는데(요 1:32) 이는 성령의 순결하고도 온유한 통치와 특성을 반영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여하튼 예수에게 성령이 내려오신 사실은 공생애 시작에 앞서 당신의 거룩한 사역을 위한 기름 부음을 앞서 당신의 거룩한 사역을 위한 기름 부음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나사렛에 있는 회당에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친히 이 기름 부음에 관한 사실을 주장하셨기 때문이다(눅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눅 4:18)
특별히 본문의 이 같은 장면은 구약 시 45:7;사 61:1 등에서 이미 예언된 바 있는 것으로 예수께 대한 성령의 영원한 은사 부여를 보여 주고 있다.
예수께서는 세례 받으신 후 곧 기도하셨는 데(눅 3:21) 바로 그 순간 하늘의 기이한 현상을 목도하게 되신 것이다. 한편 이때 이 기이한 현상은 자연계에 나타난 초자연적 현상(supernatural appearance)으로서 그곳에 모인 우리들이 함께 목격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4. 하나님 아버지의 인증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분명 말라기 선지자 이후 단절되었던 계시의 맥을 잇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음성을 뜻한다. 랍비들은 이같이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말씀하실 때 '그분의 목소리의 울림', 곧 '메아리'를 들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특히 그들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과는 구별되는 '소리의 딸'이라는 하급 계시가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도 계속 전해져 오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물론 본문의 '하늘로서의 소리'는 분명히 살아계신 하나님의 메시지인 것이다(마 3:17). 한편 하늘에서 들려진 소리는 영원한 왕이신 메시야의 즉위 개념(시 2:6)과 고난받는 주의 종의 개념(사 42:1)이 연합되어 나타나고 있다(마 3:17). 그중에서도 특별히 하늘 소리가 강조하는 바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유일하고도 가장 사랑받는 독생자가 되신다는 사실이다. 실로 마가는 그의 복음의 서두에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바 있다(1:1).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당신의 아들이라고 밝히고 계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예수가 당신의 아들됨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신다. 한편 레인(Lane,William L. The Gospel According to Mark, p. 58)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선언하신 말씀의 첫 구절("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은 동사가 현재 직설법으로 되어 있어 영원하고 필연적인 관계성을 보여 주며, 둘째 구절("내가 너를 기뻐하노라")은 부정과거 직설법으로 되어 있어 역사상의 어떤 특수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과거에 선택되었음을 보여 준다"고 했다.
"내 사랑하는 아들(호 휘오스 무 호아가페토스, ὁ υἱός μου ὁ ἀγαπητός)"
이를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나의 그 사랑하는 그 아들' 이라고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는 정관사 '그'가 명사와 형용사에 반복적으로 사용됨으로써 그 어의(語義)를 점차로 높이며 강조하는 수사법이 쓰이고 있다. 이렇듯 성부 하나님께서부터 성자 하나님에게 명명된 이 사랑은 일시적인 범주를 뛰어넘는 완전 무궁한 사랑, 영원지고한 사랑을 의한다. 특히 여기 '사랑하는'에 해당하는 아가페토스는 사랑의 최고 형식을 지시하는 말로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는 사랑의 가장 적절한 표현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랑은 여기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더럽고 악취나는 이 세상을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시고자 도성 인신(道成人身)하신 것이다(요 1:1,14).
"너를 기뻐하노라"
이 말은 앞에서 언급된 '사랑하는'이란 말의 이유도 아니며 귀결이나 결론적인 말도 아니다. 왜냐하면 '기뻐하노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도케사(εὐδόκησα)'는 부정 과거형으로서 역사적인 과거의 사실만을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영역성경의 '내가 그를 아주 까뻐하노라(KJV, in whom I am well pleased)란 번역이나 한글 개역성경의 번역은 이러한 의미에서 잘못되엇다. 물론 이러한 문법구조가 영원한 현재에 관려되어 사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헬라어 본문에서는 단순히 과거의 사실만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타난 과거의 시상은 요단강변에서 성육신하신 아들을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택하셨다는 사실을 공적으로 선포하신 것을 가리키고 있다. 또한 이러한 선포의 증거로서 예수 위에 아버지의 성령께서 강림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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