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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식탁

로뎀나무 아래의 식탁

by 소소한행복^^ 2020.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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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것은 단지 먹거리만이 아니다. 식탁은 하나님께서 매일 베풀어주시는 은혜의 자리이기도 하다. 자연을 통해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매일 우리의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은총의 실제이다. 무엇보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살아갈 수 있을뿐만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에너지를 획득하게 된다.

 

성경에는 드물게 하나님께서 직접 베풀어 주신 식탁이 등장한다. 그 중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베풀어주신 식탁은 최고의 식탁이었다. 비록 광야 로뎀나무 아래서 펼쳐진 초라한 식탁이었지만, 테이블도 의자도 근사한 그릇 하나 없는 빈약한 식탁이었지만 가장 풍성한 공급이 있는 식탁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그 식탁에 초대받은 사람은 엘리야만이 아니라 지치고 상한 모든 영혼들을 위한 식탁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의 광야



아합과 이세벨이 식구(食口)
당시 이스라엘은 참되신 하나님을 떠나 헛된 신들에게 그들의 운명을 맡겼다.

때는 바로 아합왕때였다. 그는 아버지 오므리를 계승하여 이스라엘의 8째 왕이 되어 BC 874-852년경까지 22년 동안 통치했다(왕상 16:28이하).
그는 자신의 정치적인 안정을 위해 정략적으로 두로왕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맞이한다. 이세벨, 이 여자는 혼수품으로 바알신앙을 가지고 왔다. 두로와 시돈의 제사장이자 왕인 엣 바알의 딸로서, 이스라엘 왕 아합과 정략 결혼을 하였다. 그녀는 아합과 결혼한 후에도 두로의바알 신에 해당하는 멜카르트를 계속 숭배하였으며, 그 수하에 멜카르트 우상을 섬기는 450명의 선지자와 여신 아세라를 섬기는 400명의 선지자를 거느리고 있었다(왕상 16:31이하; 18:19).

그는 아내 이세벧이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을 짓도록 허락해 주었다. 이세벨은 거짓 선지자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아합왕의 칙사로 등용시켰다. 그들은 바알과 아세라에게 바친 음식을 함께 나누는 말그래 한 식구(食口)가 된것이다. 이세벧은 거짓 선지자들을 후원하고 참된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하나님의 제단을 파괴했다.


날아가는 엘리야
성경에 하나님을 가리켜 재미있는 표현을 사용한 적이 있다.
(
34:14)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이 말씀은 특별히 우상숭배와 관련된 말을 하실 때 하였다. 하나님의 사랑을 질투라는 단어로 표현하다니 인간과 하나님의 감정은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게 된다. 바로 이 질투심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그는 마치 당시에 하나님의 질투심을 가진 유일한 사람처럼 성경에 등장한다. 그가 바로 엘리야라는 선지자이다. 하나님의 질투심을 가진 그에게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거짓 신들과 대결을 신청하였다. 하나님의 유일성을 증명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모습을 가진 정의의 사도였다.

그리고 그는 멋지게 승리한다. 850 1의 싸움에서 승리한 전무후무한 대 기록을 세운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기도를 듣고 자신을 나타내시었다. 닫혀진 하늘을 힘차게 여셨다. 먼저 열려진 하늘에서 불을 내리고(왕상 18:38), 또 잠시후 비를 내리셨다. 이 비는 3 6개월만에 내리는 단비 중 단비였다(왕상 18:45). 엘리야의 기도가 이 모든 일의.시작이었다. 하늘이 열리고 불이 내리고, 비가 내리고, 그 빗속을 뛰어가는 한 늙은 선지가 있다(46).


추락하는 엘리야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
왕상 19:2)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
(
왕상 19:4)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그의 기도가 바뀌었다. 하늘에서 불을 내려달라던 그의 불 같은 기도, 비를 내려 달라고 7번 간절히 기도하던 그의 기도는 더 이상 힘이 있지도 간절하지도 않다. 내용도 너무나 다르다. “날 이제 그만 데려가세요.” “죽여주세요.”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 답이 야고보서에 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5:17)

이 말은 곧 그도 우리와 같이 언제든 추락할 수 있는 연약한 존재였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내려오신 하나님
불과 비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은 이번에도 그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이번의 응답은 감사하게도 그의 바람대로가 아니었다. 하나님이 실패한 인간을 찾아오는 일은 아주 오래된 일이었다.

"그 날 저녁, 날이 서늘할 때에 아담과 그의 아내는 여호와 하나님이 동산에서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그분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3:8)

하나님은 이 사건 이후로 계속해서 상하고 지친 영혼들에게 찾아오신다. 이것을 복음의 본질이라 부른다. 지치고 상한 영혼, 실패하여 절망하여 살아갈 이유와 목적을 상실한 우리에게 살고 싶으면 날 찾아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가 알고 찾아 오신다. 오셔서 하시는 일은 우리를 어루만지신다.


어루만지시는 하나님
"
어루만지며", 이에 해당하는 '나가'는 특별히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에 대해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 8:18;10:16). 그리고 이때 하나님의 만지심은 상황을 변하게 하며 새힘을 주는 능력으로 작용한다. 또한 하나님의 만지심은 그 대상이 자신에게 속한 존재라는 의미를 나타낸다(7).

"그가 나에게 말하는 동안 나는 의식을 잃은 채 땅에 엎드려 있었으나 그가 나를 어루만지며 일으켜 세우고"( 8:18, 10: 16)

*이러한 만지심은 계속되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 땅이 계실 때 어떤 사람들을 기꺼이 만져 주셔서 그의 내면을 일으켜 세워주셨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문둥병이 곧 떠나니라"( 5:13)

그러한 예는 너무 많아서 일일히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특별히 눈에 띄는 볓 장면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오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일일이 손을 얹어 고쳐 주셨다(누가복음 4:40)
  • "그리고 가까이 가서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사람들이 멈춰 섰다. 그때 예수님이청년아,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하고 말씀하셨다"(누가복음 7:14)

그분은 지금도 말씀으로,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상하고 지친자들을 만져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욥이 고난 받을 때 세명의 친구가 위로한다고 찾아온다. 와서 그들을 각자 덜아가면서 한 바탕 연설한다. 아니 신학적인 강연을 하고 간다. 이것이 그에게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음은 당연하다.

주님 지진 엘리야에게 와서 먼저 가만히 만져주셨다. 손으로 전해지는 사랑은 백마디 말보다 그를 더욱 새롭게 했다.


먹이시는 하나님
주님이 엘리야를 어루만져 주시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 손수 식탁을 차려 주셨다. “일어나 먹으라.”(5) 그리고 한 마디 더 붙이신다. “일어나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7).

베드로가 실패하고 낙향했을 때에도 주님은 그를 찾아가셨다. 그리고 주님은 그에게도 조용히 음식을 준비하셨다.

"제자들이 육지에 올라와 보니 숯불 위에 생선이 놓여 있었고 빵도 준비되어 있었다."(요한복음 21:9)

주님은 멋도 아시고 맛도 아시는 분이시다. 부활하신 주님이 먹으셨다는 이 말씀은 우리를 즐겁게 한다. 요한 계시록에서 살짝 열려진 천국에 맥도날도는 없어도 생명수 강이 있고 좌우로 과일나무가 있어서 사철 새로운 과일이 열린 다는 것은 천국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고리타분한 곳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생선 직화구이를 드셨다. 천국에서 생선직화구이를 먹을 수는 없겠지만 그보다 더 맛있는 음식을 먹는 다는 것은 확실하다.


남은 길을 걱정하시는 하나님
암시적으로 그에게 더 할 일이 있음을 보이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시인 같다. 많은 말이 아니라 함축된 말로 자신의 생각을 엘리야에게 표현하신다. 엘리아의 기도에 응답하실뿐만 아니라, 엘리야의 회복을 미리 보신 하나님이시다.


모두 고침
기차를 타고 미국 죠지아 주의 어느 조그마한 도시를 지나다 보면 수선 가게의 벽에다 "슬픔에 잠긴 마음을 제외한 모든 것을 고칠 수 있음"이라고 쓰여진 큰 간판을 볼 수가 있다고 한다. 재치있고 정직한 엔지니어의 말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상하고 지치고 무기력해진 우리의 영혼과 몸을 새롭게 하시기 위해 어떤을 하셨는지 아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큰 슬픔에 잠긴 이 세상에서 살기 위하여 친히 천국의 좋은 환경을 버리시고 하나님은 그 아들로서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므로"( 4:15) 우리 연약함을 체휼할 수가 있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은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도다"(147:3)라고 노래하였다.

우리는 로뎀나무 아래 있다. 지금은 아니어도 앞으로 살다보면 우리도 로뎀 나무아래 있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때 엘리야의 하나님을 기억하자. 그 때 우리도 그분께 솔직히 기도하자하나님 참 힘드네요. 죽고 싶을 정도로저 잠깐 당신 품에서 잠잘께요. 저를 깨워주세요. 말씀으로 저를 따뜻한 어루만져주시고 먹여주세요." 이런 기도를 드릴 대상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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