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의 식탁

[선악과] 하나님의 특별 메시지

by 소소한행복^^ 2020. 7. 4.
728x90

 

*창세기 2:15-17, 3:1-7.

저희 집에 팜풀르무스 두 그루가 있습니다. 하나는 겉이 노랗고 속은 빨간 종이고 부엌 옆에 마당 한 가운데쯤 있습니다. 작년엔 딱 3개 열리더니, 올핸 셀수 도 없을 만큼 많이 열렸습니다. 꽃이 필 때 그 향이 얼마나 진하고 좋던지 벌들이 나무 가득 모여들었습니다. 그 나무 밑에서 벌들과 사이 좋게 꽃 향기 맡을 땐 마치 딴 세상에 와있는 듯했습니다. 그 열매는 어찌나 단지, 차드에서 먹은 과일 중 최고 중 최고입니다.

다른 하나는 속이 하얀 것인데, 작년에도 올해도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길옆 담장 바로 옆에 있는데 일부가지는 담장밖으로 팔을 뻗어 있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무수한 돌팔매질을 당합니다. 또 사정없이 내리치는 장대세례를 맞습니다. 어느 날 나가보니 나무 밑에 수많이 빨간 벽돌 조각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피처럼 붉은 무수한 벽돌들은 담장 옆 팜풀르무스 나무의 수난의 흔적들이었습니다.

팜풀르무스를 따기 위한 아이들의 필사적인 공격과 그것을 지키기 위한 저의 치열한 저지는 어떤 빅매치못지않았습니다. 저의 눈을 피해하기 위해 사람들은 낮이고 밤이고 새벽이고 가리지 않고 돌을 던졌습니다. 무차별 공격 앞에 해마다 담장 옆 팜풀르무스는 체 익지도 못한 채 모두 땅으로 곤두박질 치고 맙니다. 그것을 따고자 혈안이 된 사람들의 치열한 공격 앞에 담장은 너무 낮고 경비는 무용지물이고 저는 너무 무기력합니다.

팜풀르무스는 자몽이랍니다

에덴 동산에도 두 그루의 특별한 나무가 있었습니다. 생명나무와 선악과 나무입니다. 생명나무는 말 그대로 생명을 주는 나무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말그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것을 먹지말라고 하실리 없습니다. 오히려 많이 따먹고 선악을 구별하여 지혜롭게 되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선악과를 만드셨을까?

사람을 시험하기 위해 만드셨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선악과를 만들지 않았으면 따먹을 일도 없고 죄지을 일도 없었을 텐데, 그럼 저주도 사망도 없었을 테고 ...... 죄는 인간의 책임이 아닌 선악과를 만든 하나님의 잘못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은 예수님이 죽어야 인류가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를 종교지도자들에게 판 갸롯 유다나 십자가에 못박은 본디오 빌라도가 영웅이라는 논리처럼 어리석습니다.

그럼, 선악과는 무엇일까요?
상상으로 선악과 나무에 말을 걸어보았습니다. 카톡처럼 선악과에 말을 걸어보았더니, 그것이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그의 대답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들려주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선악과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우리를 향해 보내는 메시지였습니다.

1. 선악과는 차이를 말해준다
아내 친구가 일제 코끼리 밥통을 신혼 초에 선물했습니다. 지금은 쿠쿠밥솥이 주부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세계인의 밥맛을 책임지지만, 당시엔 일제 코끼리밥통이 최고였습니다. 쌀을 씻어 넣고 물량을 맞추고 맛있는 밥을 먹을 것을 상상하며 전기 코드를 꼽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타는 냄새와 함께 시커먼 연기가 나더니 고장 나고 말았습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어떻게 손도 쓸 수 없습니다. 알고 보니 밥통 밑에 전압을 맞추는 아주 작은 수위치가 있었는데, 110V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프리 볼트제품이 거의 없었고, 또 코드가 220볼트용 둥근 것이어서 당연히 220볼트용인줄 알고 꼽았다가 밥 한 번 못해 먹고 일제 코끼리 밥통을 날려버렸습니다. 사용설명서를 읽지 않은 부주의가 부른 손해였습니다.

사단은 하와에게너희가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아질 것이라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난 후 그들은 하나님같이 된 것이 아니라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제가 100볼트 코끼리 밥통을 220볼트 전기에 꼽은 것처럼 순식간에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과 우리는 하늘만큼 땅만큼 차이가 납니다. 110V 220V의 전기보다 더 큰 차이입니다. 그는 창조 주시요 우리는 그의 만드신 피조물입니다. 그는 완전, 우리는 불완전. 그는 전능, 우리는 무능. 그는 지혜. 우리는 무지하며, 그는 영원하시고 우리는 일시적이며, 그는 변함없으시지만 우리는 사라지는 아침안개와 같다.

그 차이를 아는 것으로부터 신앙은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알고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신앙은 시작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닮은 존재이지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닮을 수는 있어도, 닮아야 되지만, 결코 그와 같을 수는 없는 존재입니다. 그와 우리는 차이가 납니다.

( 59:13) 우리가 여호와를 배반하고 인정치 아니하며 우리 하나님을 좇는 데서 돌이켜 포학과 패역을 말하며 거짓말을 마음에 잉태하여 발하니....

( 5:12) 그들이 여호와를 인정치 아니하며 말하기를 여호와는 계신 것이 아닌즉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을 것이요 우리가 칼과 기근을 보지 아니할 것이며...

예수님은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해 세상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라진 선악과를 복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던 사람의 마음 밭에 선악과를 식목하는 일입니다. 성숙해진다는 것을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의 영역이 넓어지고 그의 다스림의 영역이 확장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할 수 없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한 세례요한에 대해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이가 없도다" 라고 인정하여 높여주셨습니다( 7:28).

( 12:21)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위에 앉아 백성을 효유한대
22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 하거늘
23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자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천국이 허락되지만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에겐 제 아무리 왕이라 할지라도 멸망밖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타락한 인간의 특징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만물과 양심,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 주셨지만 교만한 인간을 이를 부정하고 제 맘대로 살아갑니다. 선악과가 마음에 없기 때문입니다(1:20 -23)

하박국 선지자는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 2:14)라고 희망을 예언했습니다.

새시대, 메시아의 시대가 도래하는 증거로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을 손꼽았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 가득하리라. 그것이 회복된 에덴입니다. 그 중심에 선악과가 심겨진 사람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그의 통치를 인정하고, 그의 섭리와.... 다스림을 기뻐하며 즐거이 순종합니다.

선악과는 하나님과 우리의 차이를 말해줍니다.

2. 선악과 기준을 말해준다
바보 아들을 둔 아빠가 있었다. 늘 아들이 걱정. 최소한 굶어 죽지 않도록 농사짓는 일만이라도 가르치고 싶었다.

농사의 기본인 밭을 갈게 하는 일부터 가르쳐주었다. 한 번 밭을 갈아보아라. 너무 엉망이었다. 삐뚤 빼뚤 뱀이 기어간 것처럼 엉망이었다소가 가는 대로... “아들아, 소에 끌려가면 안돼 네가 소를 몰고 가야 해.” “아들아, 아버지가 중요한 것 한가지를 가르쳐주마. 똑바로 가려면 한가지 물건을 정하고 그것을 향해 소를 모는 거야.” 이번에도 엉망이었다. “아들아 무엇을 향해 소를 몰았니? “소 꼬리요.” “움직이는 것, 변하는 것은 결코 기준이 될 수 없단다. 움직이지 않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보아라.” 이번에는 똑바로 갈았다. 이유는나무를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선악의 기준이 자신이 되겠다는 말입니다.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이 옳고 내가 옳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 그릇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불완전합니다. 우리의 감정은 날씨처럼 변덕스럽고 우리의 생각은 카멜레온처럼 상황에 따라 수시로 바뀝니다. 우리는 감정과 상황의 지배를 받을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우리의 기준은 이해관계에 따라 수시로 바뀝니다우리가 나를 기준으로 삼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소 꼬리를 바라보고 발을 가는 바보와 같습니다. 인생이라는 밭은 결코 좋은 소출을 낼 수 없습니다.

기준은 변함없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악의 기준입니다. 그가 선하다 하는 것이 선이고 그의 눈에 악한 것이 죄입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 102:26-27)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27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년대는 무궁하리이다.

(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예수님은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21:33).

여호와는 영원하시지만, 어제나 오늘이 동일,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삶의 기초가 되며, 그의 말씀만이 우리의 삶의 표준이 되십니다. 하나님이 법이시며 기준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것에도 종속되거나 구속받지 않으십니다하나님만이 완전한 자유 자이십니다. 그는 자신의 도덕적인 성품을 따라 행동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도덕적으로 완전할 뿐 아니라 완전함의 근원적인 표준이 됩니다. 하나님의 행위가 완벽하신 것은 그분의 성품이 완벽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옳은 것만 생각하시고 언제나 올바른 것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의 법은 그의 도덕적인 완벽함에 그 기초를 두고 있어 궁극적인 의의 기준이 되며,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궁극적인 규범입니다.

오늘 우리는 포스트모던시대, 절대 진리가 부정되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진리를 상대적이라 말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사람만큼 진리가 있다. 정말 그렇습니까?

모세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신당부를 한다. “우리가 오늘날 여기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서는 하지 말지니라”( 12:8)

여기, 광야. 거기, 가나안땅.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그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구체적인 삶의 지침들을 주셨다. 바로 십계명을 포함한 규범들이다. 그러나 사사기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모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고 고발한다.

사사기는 그 시대의 끔찍한 타락의 이유를 진단하여 가르쳐 줍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17:6)

그들이 멋대로,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이유를 사사기 기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은 결국 자기 맘대로 살아가게 되어있다. 그들이 자기 맘대로 살아간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한마디로 멸망이었습니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29:18)

이 말씀의 묵시를 영어 kjv 등에서 vision이라는 단어로 번역함으로써, 오늘날 비전을 말할 때 이 구절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러나 '묵시' '하존'인데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 선지자들을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1:1; 1:1). ‘묵시가 없으면’, 이는 하나님의 계시가 없다는 의미보다는 말씀에 대한 백성들의 존중심 및 관심이 없는 상황을 암시합니다. 왜냐하면 하반절이 율법을 지키는 자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자히 행하거니와'에 해당하는 '파라(פּרע)'의 문자적인 뜻은 '벌거숭이가 되다', '멸망하다', '사라지다' 의미입니다. 그 가진 소유물뿐 아니라 입은 의복까지 벗기움을 당한 모습을 연상케 하는데 우리는 앗수르와 바벨론의 침입으로 그 소유물을 빼앗기고 결박당한 채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과 유다의 사례를 이 모습과 연결시킬 수 있다. 또한 후자는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과 유다가 멸망당하고 그 주권을 빼앗겼던 사실, 그 땅 거민이 세계 도처에 흩어져 버렸던 사실을 연상케 한다. 익히 아는 바대로 이스라엘과 유다가 그 같은 운명에 처했던 까닭은 하나님의 계시를 무시하고 무관심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4:6).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삶의 기준으로 삶고, 세상의 흐름에 우리의 인생항로를 맡긴다면 우리는 결국 자초 당하고 말 것입니다.

선악과 하나님이 우리의 기준이라고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과 그의 말씀이 우리의 신앙과 삶의 기준이다. 우리를 판단하고 세상을 심판하는 기준이다. 신앙의 시작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면,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인생지침서입니다. 매뉴얼입니다. 그의 말씀의 우리를 주장하게 하고, 그의 말씀을 우리 인생의 항로가 되게 해야 합니다.

3.  선악과는 보호를 말해준다
선악과는 우리에게 안전한 자유를 말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만드시고 그를 에덴동산에 두셨습니다. 동산() '울타리를 치다'(, 가난
גּנן)에서 파생된 단어로 본래는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는 안전한 장소'를 의미합니다. 엄밀한 의미로 정원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울타리는 역할은, 첫째로 구분, 또는 구별해주는 것입니다. 정원과 정원이 아닌 곳을 구별해주고, 내 정원과 다른 사람의 정원을 구별해주고 한계를 정해줍니다. 둘째로는 보호입니다.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해줍니다. 또 내부의 것이 외부로 유실되거나 상실되지 않도록 보호해줍니다.

선악과는 아담과 하와를 지켜주는 울타리였습니다. 그들이 선악과를 지킬 때 선악과는 그들이 에덴에 거하도록 보증이 되어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지키는 울타리입니다. 말씀을 넘어설 때 우리는 말씀의 울타리로부터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계명을 만들어 우리를 얽어 매고 우리의 자유를 빼앗는다고 생각합니다. 보호하는 울타리를 구속하는 철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속하기 위해 주신 종교적인 올가미라고 생각합니다. 그런가요?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그를 동산에 이끌어 오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먹고 싶은 대로 먹으라는 것입니다. '자유롭게 섭취하되'란 뜻입니다. 에덴동산에 몇 가지의 과일이 있었을까요? 굉장히 많았겠죠. 마음대로 먹으라고 하셨을 때, 이 말 속에는 '생명나무'(9)의 실과 까지도 먹을 수 있을 만큼의 완전한 자유와 특권을 부여했음을 보여줍니다. 다 주시고 단 한기만 금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그 자유는 무한한 자유가 아니었지만, 부족함이 없는 자유였습니다. 자유가 방종으로 흐르지 못하도록 둑을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선악과입니다. 자유가 타락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방부제를 두셨는데 그것이 선악과입니다. 자유가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누려지도록 선악과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외부의 적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고, 잘못된 욕망으로부터 우리를 지킬 수 있도록 선악과로 울타리를 두르신 것입니다.

( 1: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말씀은 그것을 지키는 자에게 진리와 자유로 인도하는 빛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그 말씀은 무거운 짐이나, 얽어 매는 올가미가 아니라 자유요 기쁨입니다. 에덴은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요일 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그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이며 즐거움입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14:21)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동산에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두려워 숨었습니다. 그리고 끝내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영광의 얼굴로부터 추방당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겠다고 말하십니다.

선악과는 우리에게 참된 자유가 무엇인지 말해줍니다. 선악과는 우리가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의 자유를 향유하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팜풀르무스 꽃은 이제껏 맡아본 향기 중 최고였습니다. 라일락도 자몽꽃 향기에 비하면 새발의 피랄까요.

결론/ 로고스를 식목하자
산악과는 한 마디로 이렇게 교훈합니다. "소유됨으로 소유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내가 소유함으로 내 것이 됩니다. 우리는 세상의 것이 내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소유합니다. 내 소유가 된다는 것은 내 마음대로 처분할 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그의 소유가 됨으로 그분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의 소유가 되려면 그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 119:56)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니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소유하는 순간 그분은 내게 불편이 됩니다. 내 맘대로 살아가지 않기 때문에 불편합니다. 선악과는 불편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불편한 삶입니다. 그러나 그 불편이 하나님께서 나를 소유하시는 길입니다. 내가 그의 소유가 될 때 나는 그분의 모든 것을 내 것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 그는 만유의 주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만드셨고 말씀으로 세상을 붙드시며 지혜로 능력으로 경영하십니다. 세계가 다 그의 것이며 그의 영광은 영원토록 무궁합니다.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로고스,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우리의 중심에 말씀, 로고스를 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는 날이 영적인 식목일이 됩니다. 그날 성령은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의 구원의 보증이 되어 주시고 우리를 위한 살아있는 계명이 되어 주십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14:26)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살면, 많은 열매를 맺고 참된 자유를 누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을 풍조를 따르고, 우리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면 우리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728x90
LIS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