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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오늘

아름답고 광대한 땅

by 소소한행복^^ 2020.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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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땅에 대한 편견 깨트리기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족속, 족속, 아모리 족속,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 3:8]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한 목적은 바로의
에서 구출해 좋은 땅으로 인도하는 것이다좋은땅은 아름답고 광대한 땅이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가나안 칠족이 점령하고 있는 땅이다.

여기서 우리는 1) 아름답고 광대한 땅이 과연 무엇이며 2)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무엇이며 3)가나안 칠족(일곱 족속) 점령하고 있는 땅이 무엇인지 보는 것이다

1) 아름답고 광대한
땅으로서 가나안 땅은 결코 아름답고 광대한 땅이 아니다. 애굽은 아름답고 광대한 땅이라 할수 있지만 가나안은 산지고 메마른 땅이다.

그런데 아름답고 광대한 땅이라 부르는가?

그것은 땅이 가리키는 영적인 실체 때문이다. 땅은 믿음의 궁극적인 결과(기업)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가나안 땅이 겉으로 보기엔 아름답지도 않고 광대하지도 않은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이다. 이사야는 사람들이 예수를 바라보는 시각이 어떠함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그는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53:2)

그러나 그분을 진정으로 만난 사람들은 그는 아름답고 크신 분이라 고백한다.

 

아름다우신 예수 광대하신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가 아름다운 것은 첫째, 그는 죄를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4:15-16).

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죄인들을 품는 가슴을 가지셨다. 그래서 그는 광대하다.

둘째, 그리스도가 아름다운 이유는 그는 타인을 위해 눈물을 흘릴 알았다. 공감능력이 세상 누구보다 크다. 그래서 또한 그는 광대하시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5:7)

타인을 위해 울줄 아는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것도 자신에게 비수를 꼽는 타인을 향해 안타까운 마음을 가질 있다는 것은 그가 아름답다는 반증이다. 그러나 그것이 연기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올 있으려면 그만큼 가슴을 가지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죄인을 위해 진심으로 울어줄 있었던 그리스도는 진정 아름답고 광대하시다.

셋째, 그리스도가 아름다운 것은 그가 순종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순종하는 자녀보다 아름다운 자녀는 없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2:8)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순종의 연속이었다. 땅에 오심과 율법을 준수하며 사신 것도, 십자가에 달리신것도 모두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셨기 때문이다. 순종의 깊이와 크기가 누구보다도 크시다. 하늘의 영광을 버려야 했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자발적으로 내려놓으셨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14: 36).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순종의 결정체이다.

뿐만 아니다. 예수의 순종은 육신의 부모에 대한 순종으로도 나타난다.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모친은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2:51).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어 피조물의 부모에게 순종하되 기쁨으로 순종하며 받들어 섬기는 모습이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2) 젖과 꿀이 흐르는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소개한다. 가나안 땅이 아무리 젖과 꿀이 많다해도 그것이 강물처럼 흐르는 땅은 아니다. 오히려 가나안 땅보다 젖과 꿀이 풍성한 곳은 도처에 널려있다.

젖은 우리의 생존을 위한 일용할 양식이고 꿀은 우리의 만족과 치료를 위한 음식이다. 가나안 땅이 하나님의 백성을 먹이고 치료하는 젖과 꿀이 풍성하다는 것은 우리의 기업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며 우리의 치료자라는 의미이다.

젖과 꿀은 진리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입에서 나오는  생명의 말씀을 예표한다. 사람은 (, )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존재이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것은 이러한 연유 때문이다. 오직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생기) 받아 창조된 인간만이 소유한 영혼 때문이다.

파스칼은 사람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채울 있는 공간이 있다고 했다. 사람의 영혼은 오직 하나님으로만 온전히 채워질 있다. 세상의 어떤 것도 사람의 본질적인 공허를 채울 수는 없다. 죄가 들어온 인간에게는 공간이 더욱 넓어졌다. 공허를 채울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다. 기록된 말씀이 아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라고 것에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 기록된 말씀이 우리의 영혼에 양식이 되려면 그것은 성령의 감동을 통해 우리에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님을 세상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세상은 역사이래 가장 풍부한 먹거리와 볼거리가 가득하지만 사람들은 공허하고 허기지고 목말라 한다.

육신의 먹거리를 얻기 위해 예수를 찾은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는 자신을 먹어야 한다고 말한다. 어떻게 그를 먹는단 말인가? 그가 인간에게 생명을 주는 생명의 떡이요, 생수가 됨을 사람들은 몰랐다. 아니.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기적이나 베풀어서 보라떡과 물고기나 실컷 먹게 해주길 원했다. 그렇게 해준다면 예수를 왕으로 옹립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날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듣고 인산이내를 이루었던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떠나갔다.

제자들만 덩그러니 예수 곁에 남아 있었다. 그들을 향해 예수가 물었다.

"너희도 가려느냐?"

베드로가 답하였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6:68)

예수가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빵이다. 그의 말씀이 생명이요 영생을 주는 양식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고치는 치료제다.
"
저가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 107:20). 사람의 심령을 온전히 치료할 있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 밖에는 없다.

가나안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말이다.


3) 가나안 일곱족속이 있는곳
가나안 땅에는 먼저 정착하여 사는 호전적인 족속들이 있었다. 그들은 강하고 무자비 하였다. 그들은 추악하고 끔찍한 종교와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복을 받기 위해 자식까지도 블태워 제물로 바치는 인간들이었다.

그러므로 약속의 땅을 가나안 일곱 족속이 거주하는 땅이라는 하나님의 소개는 가나안 땅의 다른 면을 조명해주시는 표현이다. 이것은 사탄이 점령하고있는 세상을 상징한다. 그래서 가나안 칠족은 사탄을 상징하는 존재들에 대한 표현인 것이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세상은 사탄의 뒷골목이 되었다. 사탄이 찬탈하여 합법적으로 소유한 나와바리(통치영역)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탄을 세상 임금이라고 부른다( 12: 31)

사탄은 그리스도가 땅에 오기전에 먼저 와서 땅을 점령하고 또아리 틀고 거주하며 지배하고 있다

"나보다 먼저 자는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10:8)

그래서 우리에게 적용하면, 가나안 일곱족속은 우리 안에 거하는 죄성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름답고 광대한 땅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온전히 누하려면 우리 안에 이전부터 자리하고 있던 죄성을 점령해야 한다.

사탄이 점유하고 있는 인생의 회복이 우리가 받은 구원의 목적이요 그리스도를 풍성한 땅으로 온전히.누리는 비결이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칠족을 몰아내고 땅에 이르게하겠다는 것은 우리를 회복된 땅으로 인도 하겠다는 약속이다. 이는 신약의 개념으로 회복된 인격안으로 인도하겠다는 약속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온전한 인격체의 대표이시다. 그는 온전히 회복된 우리의 모습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죄성으로 망가진 우리의 인격을 회복시킬 있는 유일하신 분이시다. 가나안 일곱족속은 우리 힘으로는 점령할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 밖에는 없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을 바울은 이렇게 정의 하였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박았느니라"( 5:24)

죄성(육체와 정과 ) 사람들만이 성령의 온전하신 지배 아래 살게 되고 그는 성령의 열매인 그리스도의 인격(성품) 닮게 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의 압제와 강탈에서 건져내어 아름답고 광대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 가나안 일곱족속이 거주하는 땅으로 인도해 가신 모세와 여호수아는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들이다. 그가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 하여 죽어주심으로 우리가 누릴 영적인 가나안 땅이 되어 주시기 위해 우리 안에 성령으로 거하신다. 우리는 아름답고 광대하신 , 젖과 꿀이 흐르는 분을 우리 안에 모시고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이 구원 이후에 부요하고 풍성하려면 우리 안에 거하는 가나안 일곱 족속(칠족) 멸하시고 승리하신 그리스도와 온전히 연합해야 한다. 그는 약속의 , 우리의 풍성 이시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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