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베소서 5: 18-33
1. 사랑이란
사랑이라는 것을 생물학적으로 정의하기 위해 학자들은 많은 연구를 실시했다. 사랑하는 연인을 볼 때 뇌는 '전기 신호'로 가득차는 것을 알게 됐다. 사랑을 하게 되면 분비되는 '도파민' 이라는 성분은 흥분과 쾌감을 불러 일으키는데 그것은 행복하게 하고, 자주 미소 짓게 하며, 두 눈이 빛나 예뻐 보이게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사랑에 빠지게 되면 우선 예뻐진다고 한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데 단점은 보이지 않고 좋은 점만 부각되어 보인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숨길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재채기와 사랑이라던가. 사랑을 하게 되면 예뻐지고 알 수 없는 빛(후광)이 보이는데 그 사랑을 아무리 숨기려 해도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펜실베니아대학교 심리학과 로버트 쿠르즈반 교수의 연구팀은 남녀 1만 526명의 데이트 행태분석결과 대부분 첫 3초 동안에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교제 여부를 결정한다는 실험보고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사랑의 유효기간은 길어야 900일이라고 한다. 아무리 열정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도 그 이상을 넘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영원히 지속될 것 같고 그녀가 그가 없으면 살아갈 이유가 없을 것 같은 사람의 사랑도 결국 식고 만다는 것이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라고 큰소리로 따지지만 생물학적으로 본 사람들의 사랑은 변한다. 그렇다면 사랑은 신기루 같은 것일까? 언젠가는 사라질 그것을 위해 사람들은 그토록 아파하고 슬퍼하고 채워지지 않은 빈 가슴을 채우기 위해 신기루를 쫓고 있는 것일까?
'사랑은 도파민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도파민을 붐비시킬 수 없는 파키슨씨병에 걸린 사람에겐 사랑이란 환상으로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일까?
사랑이 신기루가 아니라면 그 사랑을 어떻게 붙잡아 둘 수 있을까?
남녀의 역할과 사명이 있다.
2. 에벤에셀
왜 하나님께서 남자를 만드실 때, 몸의 여러 뼈가 있었는데 왜 갈비뼈로 만드셨을까? 머리뼈로 만들지 않은 것은 남편 위에 굴림 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머리는 남편이 되어야 한다. 왜 발가락 뼈로 만들지 않으셨나? 남편이 아내를 짓밟지 말아야 한다. 서로 굴림 하려 들면 안 된다. 남편은 아내에 대해 잘못된 권위를 행사하면 안 된다. 아내는 남편의 옆구리, 갈비뼈에서 왔다. 이는 둘이 동등한 인격이라는 의미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실 때남자의 돕는 배필로 지으셨다. 돕는 배필의 히브리어는 ‘에젤(에셀)’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적어도 그리스도인에게는 생소한 단어가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에벤에셀’이란 말에서 에셀이라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도우셨다.
«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가로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삼상 7:12)
근 40년간 블레셋의 압제에 시달리던(삿 13: 1) 이스라엘이 싸움에 이겼을 뿐만 아니라, 블레셋 족속의 영역권인 가나안 서쪽까지 막강한 블레셋 군대를 공격하면서 쫓아갈 수 있었던 것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우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남자가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니(창2:18)의 의미는 단지 혼자 사는 것이 좋지 못하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아담 혼자서 하나님을 섬기고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는 것이다. 아내는 남자를 도와야 한다. 어디까지 도와야 하나? ‘여기까지’다. 여기가 어디일까?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남편이 머리로서의 책임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남편이 가장으로서 가정을 잘 세울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3. 따뜻하게 감싸다
«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엡 5: 29).
바울은 본 절에서 아내에 대한 남편의 사랑을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비교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Calvin). 여기서 '양육하여 보호하라'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성숙하기까지 따뜻하게 감싼다'라는 의미이다(Wood). 사람은 누구나 자기 몸을 정성을 다하여 가꾸며 보호하며 돌본다. 그러면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보양함과 같이 남편들도 아내를 위해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끝까지 교회를 사랑했다. 자신을 저주하고 부인한 베드로를 용서하셨다. 베드로가 주를 모른다고 할 때 예수님은 그에게 따뜻한 시선을 떼지 않고 바라보셨다. 자기는 그리스도를 따를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자기의 사명을 버리고 다시 어부로 돌아갈 때 예수님은 갈릴리까지 찾아가서 그가 성숙할 수 있도록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4. 참새와 늙은 죄수
부부는 서로가 이렇게 해야 합니다. 이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해 부부의 사랑은 신기루가 되었고 가정은 깨어지게 되었다.
어느 날 늙은 죄수는 감옥 창 밖에 날아온 참새 한 마리를 만나게 된다. 참새는 매일 죄수가 주는 빵 부스러기를 쪼아 먹으며 노래를 불렀다. 죄수로서 70 평생 처음 느끼는 행복이 아닐 수 없었다.
날이 갈수록 참새에게 정을 쏟은 죄수는 비로소 사랑에 눈을 뜨게 된다. 하지만 지상의 모든 행복이 그리하듯 불행의 여신은 질투의 비수를 꽂기 위해 죄수를 바다 깊숙한 섬으로 이감시켰다. 참새를 두고 떠날 수 없는 늙은 죄수는 철사 부스러기를 주워다 조그만 조롱을 만들었다.
노인은 허술한 조롱을 소중히 가슴에 품고 배에 올랐다. 그러나 죄수들의 밀고 당기는 혼잡 속에 아차 하는 순간 노인의 허술한 조롱이 부숴지고 말았다. 놀란 참새는 푸르르 솟아올라갔으나 이내 수면으로 푹 떨어졌다. 참새가 조롱에서 빠져나와 날아가버리지 않을까 염려한 노인이 새의 꼬리를 잘랐기에 그 새는 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참새를 건져 달라는 부르짖음은 뱃고동소리에 삼켜지고 애타게 울부짖는 노인의 처절한 사연에는 아무도 귀를 기울여 주지 않았다. 찬란한 낙조가 어려 붉게 출렁이는 수면에 팽개쳐져 파닥거리는 작은 새를 늙은 죄수는 난간에 기댄 채 그저 안타깝게 바라볼 뿐이었다.
이것은 프랑스 소설가 피에르로티의 "늙은 죄수의 사랑"이란 작품이다. 이 소설은 노죄수의 쓰라린 고통을 목격한 간수가 친구에게 들려주는 형식으로 펼쳐지는데 이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친구는 "좋은 새를 구해서 그 가엾은 죄수에게 줘야겠어"라고 말한다.
그러나 간수는 "소용없는 일이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새를 갖다 주더라도 늙은 죄수의 슬픔은 달랠 길이 없어"라고 단언한다.
늙은 죄수에게는 그 참새가 아름다운 새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고 오직 사랑하는 유일한 대상이었던 것이다. 또 사랑이란 결코 다른 것으로 대치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은 다 마셔 버린 깡통처럼 언제든지 획 던져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늙은 죄수에게 있어서 사랑의 알파와 오메가는 오직 참새뿐이었다. 그렇기에 어떤 아름다운 새를 준다 해도 그 마음에 뚫린 구멍을 메울 수도 치료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오직 한 길뿐입니다(황지니, 세상사람들의 가슴 찡한 이야기).
여러분의 아내와 남편은 ‘고독과 외로움이라는 감옥에 갇힌 당신’을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바로 그 참새이다.
5. 사랑의 수고
«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한다. » (살전 1:3)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 덕목들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의 영역을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다. ‘수고’라는 단어는 ‘벤 상처’라는 의미다. 사랑에는 그러한 희생과 수고가 따르는 것이다. 아파하지 않고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 증거가 무엇인가?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요 20:19)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보여주신 손에는 못 자국과 옆구리에는 창 자국이 있었다. 머리에는 가시자국, 그의 등에 난 채찍자국이 있었다. 이 것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증거다. 남편들이여 아내를 위해 벤 상처가 있는가? 아내들이여 남편을 위해 흘린 피가 있는가?
6. 하나됨을 지키라
무엇을 알고 이해해야 하는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됨을 지킬 수 있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존 그레이’이 지은 책이 있다. 미국에서만 600만 부 이상이 팔려 나갔고, 전세계 40여 개 언어로 번역되어 읽히고 있다.
« 남자들은 화성에서 오고, 여자들은 금성에서 왔다고 상상해 보자. 아주 오랜 옛날, 망원경으로 천체를 관측하던 화성인들이 금성인들을 발견했다. 단 한번 얼핏 보았을 뿐인데도 그들은 그때까지 알지 못했던 느낌을 갖게 되었다. 사랑에 빠진 화성인들은 얼른 우주 여행 방법을 고안해 금성으로 날아갔다.
금성인들은 마음으로부터 그들을 환영했다. 그들은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었고, 예전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사랑을 위해 가슴을 활짝 열었다.
그들의 사랑은 마법과 같았다. 그들은 함께 있는 것이 즐거웠고, 무엇이든 함께하고 함께 나누면서 기쁨을 느꼈다. 비록 서로 다른 세계에서 왔지만, 그들은 그 차이를 마음껏 즐겼다. 서로에 대해 알게 되기까지, 서로 다른 욕구와 기호, 행동양식을 이해하기까지 몇 개월이 걸렸다. 그리고 몇 년 동안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조화를 이루며 함께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지구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처음엔 모든 것이 근사하고 아름다웠다. 그런데 지구 환경의 영향으로 갑자기 그들은 이상한 기억 상실증-선택적 기억 상실증-에 걸려 어느 날 아침 눈을 뜨게 되었다!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는 자신들이 서로 다른 행성 출신이고, 따라서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들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서로의 차이점들이 기억에서 모두 지워지면서 그들은 충돌하기 시작했다. »
공통분모보다는 다른 점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끊임없이 충동하고 그러면서 상처받는다.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아픈 만큼 멀어진다.
• 화성에서의 삶
화성인들은 능력과 효율, 업적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들은 자기 능력을 입증해 보이거나 힘과 기술을 신장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목적을 이루는 능력을 통해 그들은 자기 존재를 확인한다. 그리고 주로 성공과 성취를 통해서 충족감을 맛본다. 그들은 사람들이나 느낌보다는 '사물'과 '사실'에 더 관심이 많다.
여자가 자기의 우울한 마음을 무심코 털어놓거나, 낮에 있었던 속상한 일에 대해 큰 소리로 이야기하면 남자는 그녀가 자기에게 전문적인 조언을 구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는 당장 수리공 모자를 쓰고 해결방안을 내놓기 시작한다. 이것이 그가 도움을 주려 하고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그는 그녀가 느끼는 문제들을 해결함으로써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어한다. 그는 그녀에게 유능한 사람으로 비치기를 원한다.
그는 자기 능력으로 그녀의 문제를 해결해 줄 정도는 돼야 그녀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고, 나아가 그녀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느낀다.
일단 해결책을 제시했는데 그녀의 기분이 조금도 풀리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의 해결책이 무시되고 있다고 느끼고, 자기가 아무 도움도 못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어 더 이상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일 기분이 들지 않게 된다.
그냥 그녀와 같은 입장이 되어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그녀에겐 훨씬 도움이 된다는 걸 그는 꿈에도 이해하지 못한다. 금성에서는 자기 문제를 남에게 들려주는 것이 결코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가 아님을 그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금성에서의 삶
금성인들의 가치관은 화성인들과는 다르다. 그들은 사랑, 개인간의 친밀한 관계, 대화, 아름다움 등에 높은 가치를 둔다. 서로 도와주고, 관심을 쏟고, 보살펴 주는 일에 그들은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여성들은 자기의 느낌과 남들과 관계를 맺고 함께 나누는 일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한 만족을 느낀다.
둘째, 스트레스를 해결하는 방법에 있어 남녀가 서로 다르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화성인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자기를 괴롭히는 문제에 대해 조용히 생각해 보는 경향이 있는데 비해, 금성인들은 자신의 문제에 대해 누구에겐가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본능적인 욕구가 있다.
셋째, 동기부여측면, 남자들은 상대가 자기를 필요로 하는 것 같을 때 마음이 움직이고, 여자들은 자기가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면 의욕을 갖게 된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항상 신비롭다. 그것은 마치 사랑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처럼 영원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사랑이 식어 버린 데서 오는 불화나 우리 부모들이 겪었던 문제들이 우리와 무관한 것이며, 우리는 그렇게 될 생각이 추호도 없으므로 언제까지나 행복할 거라는 턱없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러다가 마법의 효력이 점차 희미해지고, 일상 생활이 대신 그 자리에 들어앉게 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남자는 여자가 자기처럼 생각하고 반응하리라 기대하고, 또 여자는 남자가 자기처럼 느끼고 행동하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서로의 차이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없으면서도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일에 별로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성급하게 요구하고 판단하고 원망하게 된다(화성에서 온 ...에서).
성경은 부부는 하나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이 하나됨을 지키라 한다. 엡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하나가 되라고 하지 않는다. 하나됨을 깨뜨리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죄가 들어와 그 하나는 분리되고 깨어졌다. 그 말은 분리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하나가 될 때 고독과 소외되었다는 두려움은 사라진다. 그러나 그 말은 차이를 제거하라는 말은 분명 아니다. 하나됨의 출발은 상대를 나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알고 그것을 받아주는 것이다. 내가 너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는 것이다. 네가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는 것이다. 남자가 여자를 나의 살이요 나의 뼈로 받는 것이며, 여자가 남자를 나의 관절과 골수로 받는 것이다. 남편이 아내를 피로 아내가 남편을 나의 심장으로 받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라고 해서 너와 내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인본주의 심리학자 Eric Fromm에 의하면 사랑은 두 사람으로 갈라 놓은 벽을 깨뜨려 하나의 공간을 만들어 주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 두 사람의 존재를 인정하게 해주는 강력한 힘이라고 정의하였다.
둘째는 떠나야 한다.
«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하나가 될찌니. » 여기서 사람은 남자를 의미한다. 출애굽하듯, 남자는 그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가정의 문제는 무엇인가? 화성에서 떠나온 남자들은 몸만 떠나오고 생각이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몸은 떠나왔지만 마음은 애굽의 여전히 머물러 있기에 끊임없이 문제를 만들어 내듯이 남자가 그들의 고향인 그 부모를 온전히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자와 온전한 하나가 되려면 남자는 화성의 문화로부터 떠나 금성의 문화를 배우고 적응하려는 헌신이 필요하다. 마치 예수님께서 하늘을 떠나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아기로 태어나셨다. 예수님께서는 자라나셨다. 즉 배우셨다는 것이다. 인간의 문화를 배우셨다. 철저히 배우셨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히 5:8)
사랑을 천부적인 능력 보지 않고 훈련과 인내로 습득해야 할 능력이다. 남자들이여 금성에서 온 존재를 배우자. 여자들이여 화성에서 온 이상한 반쪽을 배워야 한다.
7. 어떻게 이 모든 것이 가능한가?
성경은 인간은 서로 사랑할 줄 모르는 존재라고 말한다. 죄가 들어온 이후 서로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함으로만 가능하다. 실제로 18절부터 21절까지는 한 문장이다. 그리고 22절부터 32절까지는 아내와 남편의 관계를 말하고 6장 1절부터 4절까지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말하고 5절부터 9절까지는 주인과 종의 관계를 이 구절에 근거해서 설명한다. «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아 서로 복종하라 »라고 말한다. 서로 서로 복종하라. 바로 그리스도인은 모든 관계에서 서로서로 복종해야 한다. 이 복종은 그 맡겨진 역할에 따라 모든 관계 속에서 조금씩 다른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 근원은 같다. 성령의 도우심이다. 부부관계에서 남편은 사랑하고 아내는 복종하는 모양으로 나타난다. 부모와 자녀는 순종과 교훈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주인과 노예는 존중하는 마음으로 순종하고 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나타나게 되어있다. 우리의 힘으로 사랑하고 섬길 수 없다.
성령의 충만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게 하는 진정한 도파민이다. 다른 세상 적인 방법은 술취함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술의 힘으로 살아가려고 한다. 이 술에는 마약이나 기타 등등 세상의 다른 방법, 다른 힘을 포함한다. 그런 것은 결국 방탕함으로 끝을 맺게 된다. 오직 성령의 충만함으로만 온전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괴테는 '사랑하는 영혼만이 행복하다'고 했다. 어떤 이는 또 "인생의 풍랑을 견딘 사랑보다 더 아름다운 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 사랑은 오직 성령의 충만함으로 만 가능하다. 돕는 자로서의 에셀의 역할도 성숙하기까지 따뜻하게 감싸주는 것도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가능하다. 서로 상대를 위해 베인 상처를 가지는 사랑을 할 수 있는 것도 오직 우리 안에서 넘쳐나는 성령이라는 호르몬으로만 가능하다. 하나됨을 지키는 것도 오직 성령의 충만함으로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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