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는 누구나 특별한 장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아름다운 추억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은 아주 특별한 곳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곳은 다시 방문하고 싶고, 할 수 있다면 오래 머물고 싶을 것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이 그런 곳이라면 그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도 특별히 좋아하셔서 자주 방문하시고 머무는 곳이 있었을까요?
네, 있으셨습니다. 그곳은 예루살렘 근처의 베다니입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약 4km 떨어진 조그만 동네였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그곳을 나사로의 동네라고 부릅니다(막11:1, 눅19:29). 그 이름의 뜻은 '슬픔의 집'입니다. 왜 그런 이름이 붙여졌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베다니가 왜 예수님께 아주 특별한 곳이었는지를 생각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예수님은 이 땅에 계셨을 때 마땅히 머물 곳이 없으셨습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누가복음 9:58)
예수님은 때로 사역을 마치시고 폭풍우 치는 배 안에서 새우잠을 청하셔야 했습니다. 그곳이 예수님의 집이었습니다. 때로는 빈들이 주님의 집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단지 예수님의 고단한 삶을 표현하시기 위해 '머리 둘 곳도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고향에서 배척당했고, 또 많은 곳에서 배척당하셨습니다. '거라서'라는 동네에서는 귀신들린 자를 치료하시기 위해 귀신을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하셨다는 이유에서 배척당하셨습니다(마태복음 8장).
요한은 복음서를 서술하면서 처음부터 이러한 점을 부각시켰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한복음 1:11)
•지금도 예수님은 머물 곳을 찾고 계십니다
"보라, 내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요한계시록 3:20)
이 표현은 우리가 전도할 때 전도대상자에게 예수님을 영접시키기 위해 많이 인용하는 구절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미 그리스도인 된 성도(교회)를 위해 쓰여진 편지에서 주님이 주신 권면이었습니다.
'서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스테카'는 현재 완료 시상으로 이미 오셔서 준비가 완료된 상태를 의미하며, '두드리노니'의 헬라어 '크루오'는 현재 시상으로 지금도 계속해서 두드리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죄인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인내와 사랑을 알리시는 모습으로 불신앙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초청과 약속의 말씀입니다. '먹고'의 헬라어 '데이프네소'는 교제를 나누며 즐기는 식사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는 현재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과 성령을 통해 교제하시기 원하십니다(요한복음 14:23). 성령은 우리 안에 거처를 삼으시고 거주하십니다.
우리가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아니라면 우리는 여전히 주님을 문 밖에 세워 둔 그리스도인 일 수 있습니다. 생각만해도 끔찍한 표현입니다.
베다니는 예수님께 왜 편안한 장소였을까요?
•베다니 집의 특별함
성경은 우리를 집으로 표현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머물기 편안한 집일까요?
베다니에 있는 그 집의 어떤 점이 예수님에게 특별 했을까요?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4km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어서 예루살렘을 오가며 사역하시기 좋은 곳이었다는 요인도 크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수적인 요인이었습니다. 베다니에는 나사로, 마리아, 마르다의 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집에 거주하는 삼남매가 예수님께 특별한 존재요, 그들이 예수님께 쉴 만한 공간을 마련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늘 예수님을 환영하며 반겼습니다. 그곳엔 특별한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로 삼남매에게 특별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것은 상호적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그들이 예수님에게 아주 특별한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 특별함이 무엇인지 복음서는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1) 마르다의 섬김(예수님의 인성을 섬김)
이 집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사람은 맏이인 마르다였습니다(눅 10:38-42, 요 11:1-12:2). 그녀를 소개하는 기사를 보면 그녀는 예수님의 육체의 필요를 채워 주기 위해 정성을 다하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하루는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몰두하여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예수님께 부탁하여 동생을 부엌으로 데려가려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만류하며 오히려 마르다를 칭찬했습니다. 이 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마리아를 안 좋게 평가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예수님을 정성을 다해 섬기려 했던 것까지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그녀가 우선순위를 정하는데 미숙했을 뿐입니다. 그녀는 그 집의 맏이로서 예수님을 손님으로 섬기기 위해 큰 책임감을 느꼈고 호스트로서 예수님과 그 일행을 대접하고 위해 힘을 다하였던 것입니다.
아무튼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했고 육신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을 정성껏 섬기며 필요를 채워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다니 마리아의 집에서 편히 쉬실 수 있으셨고 필요들을 채우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것은 여행에 지친 자신과 제자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그 집을 즐겨 찾은 특별한 이유가 되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육신의 필요를 채우는 일은 영혼의 필요를 채우는 일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우리가 지나치게 육신의 일에만 몰두하고 영혼을 돌보지 않는 것이 문제이지 육신을 바르게 돌보는 일은 선한 일입니다. 그것이 영혼을 돌보는 또다른 방법이기도 합니다. 영혼이 머무는 집이 육체이며 육체와 영혼을 분리하여 지나치게 이분법적 사고로 나누는 것은 오히려 영상에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2) 마리아의 경청과 예수님의 신성을 섬김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로부터 영의 양식을 공급받고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를 깨우쳐 가며 점점 영적으로 자라갔습니다.
그녀가 보인 가장 빛나는 모습은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직전에 베다니에 마지막 방문했을 때 나타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베다니 시몬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저녁을 드실 때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깨뜨리고 부었습니다. 악한 자들은 그녀를 책망하며 자신들의 악한 생각(그 돈을 도둑질하려는 의도)를 숨긴 채 마치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는 착한 사람인 것처럼 가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한 행동은 결코 낭비나 험지가 아닌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위해 역사에 길이길이 빛날 아름다운 행위였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6:13)
사실 그녀는 예수님의 죽음(장사)를 미리 지낸 것이었습니다(요한복음 12: 27).
또 마리아가 향유를 붓는 사건이 가지는 숨겨진 아주 특별한 의미는 오직 유일하게 그녀가 예수님을 유월절 어린양으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취하여 하나님의 유월절을 준비했습니다. 원래 유월절 어린양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모세의 율법), 유월절 나흘전에 취하여 집에 두며 그 흠결을 살펴야 했습니다(출 12: 3, 6).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시던 그 시간이 정확히 유월절 나흘 전이라 말해줍니다(유월절은 종교력으로 1월 14일이며, 유월절 양을 취하는 날은 10일입니다). 베다니 마리아는 그 말씀에 따라 예수님의 죽음(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을 유일하게 따랐던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것을 알지 못했으며, 오히려 그들은 그곳에 오는 길에서 서로 높은 지위를 탐하고 싸우고 분쟁하였습니다. 오직 한 사람, 베다니 마리아만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죽으실 것을 아시고 그것을 홀로 준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세상에, 마귀에게 공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일 후에 율법에 명시된 대로 제사장과 헤롯, 빌라도는 유월절 어린양 예수님을 샅샅이 살피며 흠결을 조사하였습니다. 유월절 양의 자격을 테스트한 것입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에게 어떤 죄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합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베다니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은 향유는 가장 향내나는 아름다운 향기였습니다.
*찬송가 '막달라 마리아'가 향유를 부었다는 가사는 오류입니다.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은 베다니 마리아입니다.
3) 나사로의 침묵과 순종(예수님만 드러내심- 온전한 영광, 성령의 사역)
베다니의 나사로에 대한 에피소드는 많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가 죽어 장사된 지 나흘만에 예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신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로 짐작하건데 나사로는 과묵하고 순종적인 인물 같습니다. 그는 자신에 임한 기적으로 자신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 드러내는 숨은 조력자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을 먼저 맛보고 세상에 알리는 산 증거였습니다. 부활후에도 그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지냄으로써 오히려 주님을 크게 주목받게 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성령님의 사역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베다니에 예수님께서 머물기를 기뻐하시는 까닭은 예수님의 인성을 섬긴 마리아와, 예수님의 신성을 섬기고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협력자가 된 마르다, 그리고 주님만 드러내고 자신을 감춘 나사로가 거기 한 집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집이 되어야 하나요?
마태복음 12장에는 좀 특이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어떤 사람에게서 나와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쉴 곳을 찾았으나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귀신이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하고 가 보니 그 집이 비고 깨끗이 소제되고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귀신이 가서 자기보다 악한 다른 귀신 일곱을 더 데리고 들어가 거기서 살았습니다. 당연히 그 사람의 나중 상태가 처음보다 더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악한 세대도 이와 같이 될 것이다."(마태복음 12:45).
생각만해도 끔찍한 상황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성전을 두 번 청결하게 하셨습니다. 사역초기와 사역말기에 각각 행하셨습니다. 마치 성전 청소가 예수님의 사역의 처음과 마지막인 것처럼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참으로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성전이라고 말합니다(고전 3:16, 6:19)
귀신들이 좋아하는 거처가 따로 있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좋아하는 거처가 따로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께서 수시로 찾아가셔서 머물렀던 베다니 마르다와 마리아, 나사로의 집처럼 우리 주님께 편안한 거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시고 되실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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