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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설교노트

분노를 분노해라

by 소소한행복^^ 2020.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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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11-14

요게벳, 미리암, 바로의 연약한 여인들의 손길을 통해 죽음의 강에서 건짐받고 양육된 모세는 어느덧 장성하여 성인이 되었습니다.

본문 11절은 "모세가 장성한 후에"라고 말하는데, 우리는 사도행전 7 23절에서 때의 모세의 나이가 40세였음을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모세의 면모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7:22,23 증언입니다.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배워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24나이 사십이 되매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1. 그때의 모세는
1)
학문과 무예가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정치가로서 말을 잘하고 행정가로서 행정력도 탁월한 최고의 리더로 성장했습니다.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배워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7:22)

2) 히브리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히브리인을 자기 형제라 칭하고 있습니다. 바로의 궁전에서 황태자로 자란 그가 히브리 노예들을 형제라 창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는 자신이 히브리인이며, 별시 받는 노예듥과 자신을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훗날
"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고백한 것은 그러한 정체성에.기인한 진솔한 고백이었음을 우리는 조금도 의신할 없습니다.

3) 그는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자기 형제들에게 다가갔습니다. 형제들을 돌아 생각에 히브리 인들이 사는 고센 땅으로 잠행을 나간 것입니다.

*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23)

모세는 40세가 되었을 때에, 나물랄데 없을만큼 그는 모든 영역에서 아주 성장하였고 누가 보더라도 고통받는 하나님의 백성, 자기 민족을 구원할 영도자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분 만을 확대해서 평가한 그의 모습이지, 그의 진면모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드러난 표면만을 묘사한 것이지 드러나지 않은 그의 내면과 성품은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를 숨김없이 보여 줍니다. 그는 자신의 진면모를 정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이유는 아무도 주목하는 자가 없고, 타인의 시선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12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 좌우를 살펴 아무도 없음을 보고"

 


2.  지금 우리는
아무도 보는이 없을 행하는 우리의 모습이 진짜 우리의 실체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인격이라고 부릅니다. 아무도 보는 없을 때의 우리의 자세가 성품이라면 그것이 행동으로 드러난 것이 인격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여지는 모습이 전부가 아닙니다. 교회나 사회에서 남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 행해지는 모습이 아닌, 아무도 보는 없을 살아가는 모습이 진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마음에 담아 것을 여과없이 드러내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연 아무도 보는이 없을 어떤 모습입니까? 말은 , 우리가 별로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아주 가까운 사람들, 특히 가족들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를 평가해보라고 도전하는 말씀입니다. 너무 익숙하기에, 너무 편안하다는 논리로 공기를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가족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에 담겨진 것을 쏟아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자세와 어떤 , 표정으로 가족을 대합니까? 진짜 우리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하는 모습이 진정한 우리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많이 반성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회피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말씀이 지적하는 것을 그대로 수용하여 우리를 곧게 세워야 것입이다.


3. 어디서 쓴뿌리가 돋았나
척박하고 메마른 대지에도 비가 내리면 온통 푸르른 동산이 됩니다. 거기에는 가시풀과 엉겅퀴같은 독초들이 무성하여 사람들의 접근을 불허합니다. 그러한 풍경을 맞이할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누구도 씨를 뿌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곳에 악한생명이 움텄을까요? 없던 것이 갑자기 생겨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디선가 바람이 가져와 흩뿌려놓은 씨앗들이 비가오자 싹을 낸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생명이 가득한 푸른 동산이지만 그것을 먹는 동물을 죽이고 사람들을 찌르고 괴롭히는 가시나무입니다.

우리가 별로 의식하지 않는 순간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순간에 행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당장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사소한 것들로 보입니다. 멀리서 보면 오히려 근사해보이까지 합니다. 푸르르고 바람에 살랑살랑 거리는 모습은 손짓하며 우리를 부르는 다정한 모습으로까지 보여집니다. 그러나 가까이 가면 사뭇 다른 모습에 우리를 아연실색하게 만듭니다. 더이상 가까이 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요 아프니가요.

인격이 무너진 사람들, 바르지 못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면 살맛이 달아납니다. 자신과 주변을 파괴합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모세도 겉으로 보기엔 성장한 멋진 어른으로 보였지만, 아무도 보는이 없을 그가 보여준 그의 성품과 인격은 자신과 주변을 비통함에 빠트렸습니다.


4. 성품이 삐뚤어 지고, 인격이 무너지면
1)
번의 실수로 그는 모든 것을 잃고 맙니다. 한번의 잘못으로 그는 애굽의 왕자의 지위를 잃고 광야의 떠돌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한번 뿐인 인생이에 번의 뼈아픈 실수가 돌이킬 없는 불가역적인 불행을 낳을 있습니다.

2) 모세를 물에서 건지고 양육한 양모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수많은 반대와 위험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인을 양자로 삼고 양육한 그녀는 모세의 이러한 행동으로  크나큰 곤경에 처했을 것입니다. 그녀의 40 동안의 노고가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입니다. 그녀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습니다. 온갖 위험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를 향한 무한한 기대와 사랑을 가지고 헌신했던 그녀의 현모(賢母) 삶은 무의미하게 끝나고 말것입니다.

그로인해 그가 구원하려던 히브리인들은 더욱 곤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바로가 히브리인들을 더욱 무거운 짐을 지우고, 혹독하게 대우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소식을 듣게 그의 생모와 누이 미리암은 얼마나 허탈하고 억장이 무너지겠습니까?

3) 그가 목적한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습니다. 모세의 표현대로 '자기형제인' 히브리인들도 그를 리더는 커녕 자기들의 형제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튿날 다시 모세가 나가서 보니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그릇된 자에게 말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그러자 히브리인이 대답합니다.
"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 같이 나도 죽이려느냐?"

분노, 그리고 그것이 외적으로 표출된 폭력이나 또는 강압적인 힘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없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잃게 것입니다.

이렇듯 나쁜 감정에 지배를 받게 되는 사람은 가는 곳마다 관계가 깨뜨립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씻을 없는 상처를 줍니다. 공동체를 파괴하게 됩니다. 자신이 의도한 결과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만들어내고 자신과 주변을 파괴합니다.

1) 타인과의 관계가 깨진다
2)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힌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물을 드리전에 형제와 다툰 일이나 잘못한 일이 생각하거든 예물을 두고 즉시 가서 화해하라고 말합니다.

3) 자신을 병들게 한다.
분노에 사로 잡힌 사람들, 자기 감정을 억제하고 콘트롤할줄 모르는 사람은 무엇보다 자신과의 관계가 나빠집니다. 자신을 사랑할 없고 자기 합리화 하기에 급급합니다. 육체의 건강에도 해가 됩니다.

심인성 의학(psychosomatic medicine) 연구 분야의 개척자인 하바드 대학교 월터 캐넌 박사(Dr. Walter Cannon) 분노의 증상을 좀더 전문적으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심장 박동이 빨라지며, 동맥의 혈압이 올라가고, 혈액이 위와 장으로부터 이동하여 심장과 신경조직과 근육으로 집중되며, 소화기관의 운동이 정지되고, 간에 저장된 당분이 몸에 분배되며, 비장(지라) 수축하면서 농축된 혈구들을 배출하고, 아드레날린이 혈액 속에 분비된다".

화가나면 결국 자기가 손해를 봅니다. 자기 건강을 해치고, 자신의 인격이 무너지도, 자기 내면이 파괴됩니다.

 

5.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1)
좌우를 살필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살펴야 했습니다
감정의 지배를 받아 행동할 경우 낳게될 사생아가 얼마나 망나니 같은 존재가 될지 큼찍한 결과를 살펴야 합니니다. 자기 내면을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서치라이트를 비취듯 말씀의 빛으로 우리의 내면을 살펴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보지 못합니다. 성령의 조명을 받은 말씀의 빛으로 비춰야합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라"( 12:14-15)

2) 쓴뿌리를 제거해야 합니다
쓴뿌리로 표현된 정신적인 죄는 하나님께 시인하고 처리하지 못하면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게 합니다. 그결과는 자신과 많은 사람들을 괴롭게 합니다" 그것을 성경은 한마디로 '비통함'이라고 표현합니다.
비통함은 사랑을 증오로, 행복을 원한으로, 원한을 복수로, 존경을 비방으로, 축복을 저주로 변질시킵니다.

쓴뿌리로 번역된 헬라어 '리자'라는 단어는 뿌리라는 단어에서 암시하듯이 그것은 우리의 죄성,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 뿌리를 태도와 행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처리된 우리의 죄성에 다시 뿌리를 내리게 되면 반드시 맺게되는 악한 성품의 열매를 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타락한 죄성의 지배를 받는 존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로 새생명 가운데 살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두번째 아담, 또는 마지막 아담이라고 합니다. 아담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가 새로운 인류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머니 배에서 태어나는 순간 첫번째 아담의 타락한 죄성을 물려받아 부패한 존재가 됩니다. , 쓴뿌리에 연결된 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 맺는 열매는 자신과 남을 괴롭게 하는 쓴열매입니다.

신선하고 바른 열매를 맺으려면 좋은 열매를 맺는 새로운 나무에 접붙임되어냐 합니다. 그리스도께 접붙임 받아여만 좋은 열매를 맺을 있습니다. 인류의 새로운 조상인 그리스도에 접붙임 받아 새로운 뿌리에서 오는 거룩한 것들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그리스도와 연합하면 우리는 새로운 뿌리를 가지게 됩니다. 타락한 아담의 죄성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변질되고 독이 가득한  영양분을 빨아들여 독을 품은 열매를 맺는 존재에서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의 성품에서 흘러나오는 성품의 열매를 맺습니다.

3) 다시 태어나야 한다
우리의 인격은 훈련이나 학습만으로는 온전해지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새로 태어난다고 말합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없느니라."( 7:16-18)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을 입으라"( 4:22-24)

인격은 가르침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알맞은 상황 속에서 자연스레 성장한다고 합니다. 바로 알맞은 상황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예수님의 인격을 따르고 귀한 공동체 안에서 교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4) 실제적인 연합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남편은 아내는 이모양 입니까? 아니, 나는 여전히 모양입니까?

그것은 여전히 죄성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법적으로는, 신분적으로는 새사람이 되었지만 주님 안에 머무는 , 주님께 붙어있는 삶을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없음 같이 너희도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안에, 내가 안에 있으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없음이라."( 15:4-5)

성도는 일단 고백한 죄에 대해서는 다시 접촉하지 말아야 합니다. 죄는 잊어버리고 영적인 삶에서 푯대를 향해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잠언 27 17절은 우리에게 중요한 원리를 가르쳐 줍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같이 사람이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우리가 주님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주를 닮을 없습니다. 지식이 아닌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 주님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그리스도 영접하여 구원받았음에도 여전히 죄성을 따라 사는 분들이 있다면, 그것 자체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근심케하는 죄임을 알고 철저한 회개를 통해 성령충만을 회복하고 열매맺는 삶을 살아야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도 없을 , 삶의 울타리를 같이 하는 가까운 가족, 이웃, 친지, 교우, 직장동료에게 상처를 주는 말과 태도를 반복하고 있다면, 성령을 따라 사는 인생이 아니라 죄성을 따라 사는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임을 알고 죄성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5) 무엇보다 어디든지 계시며 사람의 폐부를 살피는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17 10절은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행위와 행실대로 보응하신다" 말합니다.

모세가 좌우를 살필 필요도 없이 어디든 계시는 하나님을 알았더라면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그를 유혹할 , 성경은 시각에 집에 다른 사람은 전혀 없었다고 증언합니다( 39:11).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며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코람데오'(하나님 앞에서) 신앙을 가진 대표적인 성숙한 성도입니다.

6. 가장 온유했던 사람 모세
모세는 아무도 없을 때에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 특히 분노를 조절하지 못함으로 인해 살인을 하게 됩니다. 결과는 참으로 비참했습니다. 그런데 이후에 모세에 대힌 놀라운 평가가 등장합니다.

"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12:3)

모세가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환경에서 다듬어지고 길들여 것입니다. 자기의 천연적인 기질과 성품을 십자가에 못박고 새로운 피조물로 빚어지고 자라난 것입니다.

우리의 천연적인 성품으로 나오는 것이 아닌 성령께 온전히 다스림 받을 가능합니다.

우리의 본성에서 나오는 악한 말과 행동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괴로움을 주는 인생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을 십자가에 못박고 의와 거룩함으로 새롭게 새사람을 입어 다른 사람을 세우고 생명력을 불어넣는 복된 인생으로 새로와지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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