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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설교노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

by 소소한행복^^ 2020.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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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소서'를 깨나 써보신 분들은 알것입니다. 쓰는게 쉽지않죠. 나에 대해서 쓰는데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간결하면서도 자신만의 장점과 개성을 가독성있게 써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스캔하듯 쓱 대강 눈으로 훑어 내려가는 선택권이 있는 자의 눈을 붙잡을 수 없습니다. 눈을 붙잡지 못하면 결국 마음도 얻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사명을 주어 애굽에 보내시기 전에, 먼저 모세를 부르시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존재이신지를 소개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기소개는 정말 독특합니다.

 

하나님의 자소서

*출애굽기 3:6/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1)
나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니요?
어떤 신의 자기소개가 이러할 수 있습니까?

대통령의 불알친구가 누군가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나는 --- 대통령이랑 불알친구야라고 소개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대통령의 인기, 지위, 권력에 기대어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대통령이 누군가에게 자신을 소개하면서 나는 대한민국대통령이라 소개하지 않고, 나는 아무개의 불알친구라고 소개했다면 이것은 엄청난 사건이 됩니다. 그런데 그 아무개가 시골의 촌부라면 이것은 사건이 아니라 기적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 대통령을 비난할 자도 많을 것입니다.

모세를 불러 놓고 그 발에서 신발을 벗게 하신 하나님의 자기소개가 그러한 모양을 띄고 있습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람의 이름을 수식어로 사용하여 자신을 규정한다면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을 소개하며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선택되고 부름 받기 전 우상숭배자였고, 우상을 만들어 밥 벌어먹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에 연결하여 자신을 기꺼이 소개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십니다. 이삭은 존재할 수도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아브라함이 낳은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한 인물입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아이를 출산할 수 없는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존재할 수도 없었던 자를 하나님께서 친히 창조하여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니시면 이삭은 무였습니다그의 하나님이라 소개합니다.

또 그의 아들 사기꾼의 대명사인, 야곱의 하나님이라 소개합니다.

백번 양보하여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났고, 이삭을 제물로 바칠만큼 신앙의 성장과 순종의 모습을 보여준 사람이니 그런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에 붙여 사용할 만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삭도 그런대로 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자신을 결박하여 죽이려 할 때에, 이를 거부하거나 도망칠 수 있었지만 죽기까지 순종한 모습에서 위대한 믿음의 업적을 찾아볼 수 있어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으로 사용할 만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득 아름다운 면모를 찾아보기 힘든 인격과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 하나님은 자신을 굳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소개하실까요?

이는,
나는 그들을 부르시어 언약을 맺고 그들의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겠노라 약속한 하나님이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 내가 너를 통해 그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그 땅으로 데리고 가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의미가 오늘 본문의 하나님의 자소서에 담겨있습니다.

그것은 구체성이다
구체성이란, 그 누군가가 아닌 꼭 찍어서 바로 너라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고, 그래서 내가 구원하고 내 것을 나눠주고, 나와 교제하고 나와 더불어 함께 역사를 써갈 사람은 다른 누구도 그 누군가도 아닌 바로 너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내 언약의 당사자요, 내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아프고, 슬프고 괴로운 것도 바로 아브라함 때문이요, 이삭 때문이요, 야곱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구체성(specificity)이다고 말을 할 정도로 구체성은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이 구체성이 우리를 우리 되게 하며, 나를 나되게 하여 우리에게서 나를 구분하고 구별하게 해줍니다.

김춘수님의 꽃은 이것을 너무도 잘 표현한 시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라는 시구가 본문의 하나님의 자소서의 의미를 문학적으로 해석해주는 주석서와 같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이름을 부르셨고, 이삭의 이름을 부르셨고, 야곱의 이름을 바꿔 주셨다. 그의 이름도 부르셨습니다.

* 43:1/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한 사람을 부르시고, 그와 구체적으로, 인격적으로 생명언약을 맺고 그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자기 의지를 표현하시었습니다.

그 관계는 야곱으로 끝난겐 아니다. 삼대 까지만 그 이름을 언급했지만, 야곱의 아들 유다의 하나님이시며, 그의 아들 베레스의 하나님이시다. 뿐만 아니라 오늘 그 약속의 성취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나의 하나님이시다.
조승호의 하나님이시며, 박원영의 하나님이시며, 주예은의 하나님이십니다.

 

공허한 이름이 아니다
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그 구체성이 없다면 신앙은 공허한 개념에 불과합니다. 종교와 같이 단지 자기위안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개념내지는 자기 만족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중요한 단어인 믿음과 사랑은 구체성이 없으면 이 보다 공허하고 허무한 것도 없습니다. 말만 무성하고 실행이 없으며, 개념만 있고 실체가 없는 허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공허한 메아리가 아닌 이유는 그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께서 살아 계실 뿐만 아니라 전능하시고 구체성을 가지고 우리와 관계를 맺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개념이나 상상이나 그저 그렇고 그런, 마음도 전혀 담기지 않은 공허한 말잔치가 아니라, 육체에 담을 수 있고, 우리의 인격에 느껴지고, 우리의 마음으로 교감과 교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구체적 실체와 역사적 실증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복음은 인격적이고 구체성을 가진, 진짜 사랑이고 관계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거짓도 공허함도 없습니다. 그저 화려하고 번지러 한 말뿐인 언어유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구체성을 가질 때, 그 대상이 구체화되고 인격적인 관계 맺음이 되었을 때, 유치한 사랑의 고백은 공허함이 아닌 꽉 찬 충만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뿐만 아니라, 이 세상이 구체성을 가진 실체가 된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구체적인 실제로 계시면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구체성을 부여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생각 속에만 머물게 하셨다면 우리는, 세상은 존재할 수 없었기에 추상적인 것도 못되는 무(nothing)였습니다.

 

대상성을 가진 존재시다
괴테의 세레나데나 나훈아의 세레나데나 똑같습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달콤해 보여도, 그것이 공허한 것은 그들이 나를 위해 그 노래를 만들고 부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허할 뿐 내게는 아무런 감동도 주지는 못합니다(물론 듣는 것만으로 감성의 터치가 있지만, 나 하고는 무관한 것이기에 공허한 개념일 뿐입니다). 그러나 음정과 박자가 틀려도 그 체적인 대상이 있고 그녀에게 그의 진심을 담아 부르는 세레나데라면 좀 듣기 불편할 수는 있어도 공허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설레게 하고, 행복하게 하고, 살게 합니다.

 

바로 나(박강수, 박창근의 노래)
너의 창을 향해 내린
햇살의 의미는
바로 나 바로 나
너의 두 뺨 위로 떨어진
눈물의 대상도
바로 나 바로 나
우우 우우 우우우
우우우우우
우우 우우 우우우우
너의 창을 향해 내린
이 밤의 의미는
바로 나 바로 나
너의 두 뺨 위로 떨어진
슬픔의 대상도
바로 나 바로 나
내 가슴속에 피는
붉은 꽃들은
당신을 향하였고
영원의 향기에 취해
춤을 추다가
깊고 깊은 잠에 빠졌네
너의 창을 향해 내린
햇살의 의미는
바로 나 바로 나
너의 두 뺨 위로 떨어진
눈물의 대상도
바로 나 바로 나

(그대만을)
노란 불빛 가로등 하나
그대 집 앞 골목길
숨가쁜 오르막
마냥 좋았던
감나무 한 그루도
바람 길이
그대 창을 지나 갈 때마다
내게 다정한 마음
드리워 웃음을 짓네
아무도 찾아오지 않던 날
긴 날은 너무 외로워
그대 나를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네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에도
나는 슬펐네
투명한 바람만
나의 창가를 머뭇거리다 가네
꿈만 같아
그대 목소리가
방 안 가득
내게 들려준
사랑의 노래
눈을 감으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려
눈물도 보이지 않던
그대만을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네
그대만을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네

 

이 구체성은 편드는 것이다
친구라고 알고 있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편들지 않을 때... 그때 우리는 그 공허한 우정때문에 허탈해지고 외로워집니다. 혼자라고 느껴져 서글퍼지죠. 그래서 세상에서는 사랑해도 외롭습니다. 한 이불을 덮고 자도 허전한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편을 들기 어려우면 이렇게 핑계를 댑니다.
"
니가 잘못했잖아."

그런데 친구가 무슨 잘잘못을 따지나요? 무조건 편을 들죠.

그런게 있나요?

 

성경의 예) 무조건 편들어주기.


1)
모세의 편들어 주기

* 32:31-32/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모세는 하나님께 맞서 그 백성편을 들었습니다. 모세가 중보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했다 그냥 그렇게 간단하게 읽고 지나갈 내용이 아닙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타종교와 기독교를 구별하고 본질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과 자신을 동일시했습니다. 하나님, 그들과 나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없으면 나도 없습니다. 그들을 멸하시려거든 내 이름도 하나님의 책, 생명책에서 지워주세요.

하나님께 맞서서 범죄한 백성편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그 마음을 읽으셨습니다. 그 마음이 우리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시기에 하나님은 모세의 고백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2) 바울의 편들어 주기
그런가하면 신약성경에도 같은 고백이 등장합니다.

* 9:3/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이 고백은 바울의 결의가 아닙니다. 그도 모세처럼 그의 전 인격으로 한 고백이며, 구체적인 대상을 향한 사랑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하나님의 이름의 참된 의미입니다.

 

구체성의 절정이 성육신이다
*
1: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육신이 되셨기에 우리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습니다. 함께 먹고 마실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도 우리를 경험하여 알고 우리 편이 되어 주셔서 편들어 주시되 끝까지 편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를 공감할 뿐 아니라, 그의 성품이 더하여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편들어 주시고 지금도 우리를 위해 하나님 우편, 가장 가까이에서 우리를 편들어 주십니다.

"우리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할 수 없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그분은 모든 점에서 우리처럼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죄는 없으셨습니다."(히브리서 4:15)

길지만 다음 말씀은 천천히 꼭꼭 씹어 음미해야 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체성입니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계신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우리는 들었 고 우리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며 손으로 직접 만져 보았습니다이 생명이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직접 보았으므로 그분을 여러분에게 증거하며 전합니다. 그분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 전하는 것은 여러분도 우리와 교제를 갖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교제는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갖는 교제입니다(요한일서 1:1-3).

하나님은 인간들을 창조하시고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범죄하고 타락하여, 계속해서 반역하며 패역한 인간을 포기하거나 유기하거나 멸망시키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관계 맺고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심지어 그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되어서 이 세상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동시에 여타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먹고 마셨으며 피곤해하셨고 고통스러워하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슬픔과 아픔을 아십니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듣고 계십니다. 우리가 느끼지 못할 때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부르짖을 때도, 조용히 말씀드릴 때도 우리는 그 약속을 믿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구체성이다
이 하나님의 구체성인 성육신이 없으면 구원도 없습니다. 창조는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그런데 구원은 성육신으로 하셨습니다. 왜 십자가로 하셔야만 하나요?

하나님의 사랑이 공허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로만 때우거나, 결정적인 순간에 뒤로 빼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참이고 진실되며 구체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그 사랑이 그의 육체를 통해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편들기의 절정이 바로 아들 하나님의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십자가는 한마디로,
~
예수님이 우리편을 드신 결과입니다.

그가 우리에게 빚진 것도 없고, 우리 편을 들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우리들 죄인편을 들었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13:1)."

'끝까지', 죽기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사랑하셨다는 것인가요? 막역한 누군가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에는 구체성이 있습니다. 그 대상이 분명합니다. '자기 사람들'입니다. 그 자기사람이 바로 나와 당신인걸 믿으십니까?

그래서 그리스도의 그 사랑을 절정, 극치- 꼭대기, 충만, 차고 넘침, 덤이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에 충만함과 더하여 덤을 얹어 놓았다고 불어성경은 번역했습니다. 부족하거나 겨우 턱걸이하는 사랑이 아닌, 넘치는 사랑을 하셨습니다. 말뿐인 공허한 사랑이 구체적인 사랑을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5:8)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공허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막연한 누군가가 아닌 꼭 집어 바로 ''라는 구체적인 대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뿐인 공허하고 공갈사랑이 아닌,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준 구체적인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에 맞서 우리편을 드심으로 빚어진 결과입니다. 모세는 내이름을 빼 달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 저주를 받아도 좋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살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죽겠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여호와는 내편이라는 말씀은 그런 의미이다.
*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118:6-7)

그러나 악용하지 마십시요. 막살아도 내편이라는 편리성, 변명의 도구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사랑도 구체적이어야 한다
엘리야 선지자 때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구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우상숭배, 도덕적 타락은 이방인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그가 동경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것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바알과 아세라를 섬길 때 그들은 난잡하고 더러운 삶을 살게 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엘리야는 그래서 이스라엘을 갈멜산으로 소집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섬기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850명도 소집했습니다. 우리 한 번 누가 진짜 신인지 대결해보자. 하늘에서 불을 내리는 신이 진짜신이다. 너희가 섬기는 신이 살아 있다면 구체적으로 그 실체를 드러내 보여줄 것이다.

또 여호와가 진짜 신이시면 그의 살아 계심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되심을 구체적으로 그 존재를 입증하실 것이다.

불은 오직 엘리야가 쌓은 제단에만 임했습니다. 그 때에 엘리야는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부르십니다.

*엘리야는 단 앞으로 가서 이렇게 기도하였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이라는 사실과 내가 행한 이 모든 것이 주의 명령임을 입증해 주소서(열왕기상 18:16, 36).

하나님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조상들의 하나님이시니 그들과 맺었던 언약을 기억해 달라고 청원하는 동시에 지금 엘리야를 바라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조상들의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때 엘리야가 백성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언제까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을 작정이오? 만일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여호와를 섬기고, 만일 바알이 하나님이면 바알을 섬기시오.” 그러나 백성들은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열왕기상 18:21).

엘리야는 다른 것이 아닌 신앙의 구체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구체성, 믿음의 대상이 누구인지
-
사랑의 구체성, 사랑의 대상이 누구인지
요구하고 있습니다.
-
소망의 구체성이, 그들의 소망의 근거가 무엇인지 말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체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 사랑의 진실성을 구체적으로 삶속에서 보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셨던 하나님은 이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우리편이시며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을 삶의 현장에서 구체성있게 사랑하고 있습니까?

공허한 말과 공갈 믿음으로 구체성이 결여된 섬김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전히 미신을 따르고, 자기욕망이 삶의 우선순위가 되어 매일매일을 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 되어 하나님께서 사랑과 믿음의 대상이 아닌, 나를 위한 알라딘 램프의 지니와 같이 필요할 때만 부르고, 부려먹는 신은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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