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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설교노트

나그네 인생

by 소소한행복^^ 2020.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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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15-22

어린왕자의 작가 생텍쥐페리는, 1935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한다. 비행기 조종사였던 그는 그곳에서 5 동안 생사의 지경에서 헤매는 일을 겪게 된다. 그곳에서의 모든 시간과 고통의 체험이 어린왕자라는 작품을 낳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을 있다. "현대인의 정신적인 좌절과 절에서 어떻게 구원 받을 있는가?"하는 것이 작품의 주요 주제이다. 그는 구원을 작품의 마지막 우물을 발견하는 대목에서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우물을 발견하도록 길을 안내하는 이가 바로 어린왕자라는 점이 중요하다. 어린 왕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구원의 조건이 되는 동심의 본질을 형상화한 것으로 있기 때문이다( 18:3).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너희가 변화되어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기성 세대들은 어린 아이의 마음 , 주님의 마음을 회복할 때까지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우물을 찾아 없다. 사막에서 비행기 고장으로 불시착한 ''라는 나레이터는 마지막 방울의 물까지 마신지 어린왕자에게 "나도 우물이 있는 대로 찾아 있으면 좋겠구나"라고 말한다. 그때 어린왕자는 여우에게 들었던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그곳 어딘가에 샘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에요"라고 말했다. 나는 이렇게 화답한다. "맞아, 집이나 별이나 사막이나, 그들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거야. 지금 내가 바라보는 것은 껍데기에 불과하지. 가장 소중한 것은 보이지 않아."(조신권의 명작의 숲에서)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잠깐후면 사라질 허상을 쫓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이것이 생텍쥐페리가  들려주고 싶은 메시지이다. 이는 성경의 메시지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 세상도 그것에 대한 욕망도 지나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삽니다."(요한일서 2:17)

그럼,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다시말해 생텍쥐페리가 말한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풀처럼 마르고, 꽃처럼 시들어버리는 세상에서 불시착한 '이방인'처럼 살아가는 우리들이 소유해야 것은 무엇일까? 오늘 우리는 방황하는 모세를 통해 우리의 보금자리가 어디인지 생각해보고 은혜를 발견하기 원한다.

1. 애굽의 왕자에서 광야의 방랑자로
1)
애굽에서
40
세가 모세는 어느날 자기 동포인 히브리인들의 아픔을 보듬어주기 위해, 그들이 사는 곳으로 민정을 살피기 위해 나갔다. 그의 신분은 이집트의 왕자였지만, 그가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의 정체성은 히브리인이었다. 그곳에서 애굽사람이 히브리사람을 괴롭히는 것을 보았다.

모세는 좌우를 살펴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자 애굽사람을 쳤는데 그만 그가 죽고 말았다. 순간 그는 자신이 히브리인이라는 동질감과 연대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 , 그는 히브리인으로부터 배척을 당했습니다. 히브리인에게 모세는 동족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후로 모세에게는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 가는 여정이 펼쳐진다. 3 장소인 미디안 땅에서 말이다. 끝에서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

2) 미디안에서
모세는 이제 지명수배자에다 도망자가 되었다. 애굽이 아닌 다른 곳에 머물게 것은 처음일 것이다. 나일강의 풍요가 가져다준 애굽, 바로의 후계자로 왕자로 살았던 이집트의 왕궁과는 너무도 다른 환경에 내몰린 것이다. 얼마나 헤메다 그곳에 오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몸과 마음이 지치고 피곤한 상태였다. 앞날이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는 참으로 암단한 상황 가운데 놓였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마을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여행에 지친 몸을 쉬이고 목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 마을에 들어갔고 마침 마을 어귀에 있는 우물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목을 축이고 쉬고 있었다.

2. 우물, 생명의 원천이 되는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 우물을 숨겨두었다는 것이다.


우물은 생명의 원천이 되는 곳이다.

당시 사회, 특히 광야와 같이 척박한 땅에서 우물은 삶의 기반이 되는 가족에게 생명수를 공급하고, 삶의 기간이 되는 가축에게 마실물을 제공해주는 곳이기 때문에 생명의 젖줄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물을 파고, 우물을 빼앗고, 빼앗으려는 자들로부터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우물에 모여서 삶을 나누고 정보를 주고 받는다. 소통과 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거기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사랑이 삭트는 곳이다. 목마른 영혼을 촉촉히 적셔주는 곳이 그곳이다. 우물, 우물가는 성경에서 목마른 목을 축이듯 갈급한 인생을 생수로 채워주는 곳으로 상징되어진다.

1) 구약에서
그래서 성경에는 우물가에서 탄생한 위대한 사랑과 채움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한다. 우물가는 인생의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가 새롭게 시작되는 곳이다. 대표적인 이야기가 구약에서는 오늘 우리가 나누려는 본문과 리브가의 이야기일 것이다.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모친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모친 상사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 24:67)

어머니를 먼저 보내고, 공허한 이삭을 위로해준 리브가를 아브아함의 엘리에셀이 처음  만난 곳은 우물가였다( 24:42-46).

2) 신약에서는
신약에서는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과 예수님의 우물가의 만남이다. 이야기를 기록한 요한복음에 보면,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must needs go) 하겠는지라"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예수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실 사마리아를 거쳐서 가셨는데, 이는 유대인이 일반적으로 가는 여행경로가 아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경로를 일부러 택하셨다고 요한은 증언하고 있다. 주님께서 반드시 사마리아를 거쳐야 하시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사마리아에서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였는데 수가성에 사는 여인이었다. 예수님은 여인을 만나시기 위해 여섯 시에 수가성에 있는 우물앞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여인은 평판이 좋지 못한 여인이었다. 그녀가 눈이 열려 예수님께서 메시야인것을 알아보았을 그녀가 보인 반응은 요한복음을 읽는 이를 흥분하게 한다.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자신에게 따가운 시선을 보내던 사람들을 찾아 달려간다. 그들을 피해 때론 숨고, 때론 달아났던 그녀가 스스로 그들을 찾아 뛰어 간것이다. 예수님이 생명의 물임을 깨달은 인생에게 찾아오는 변화를 보여주는 에피소드이다.

2. 공격받는 우물가의 여인들
다시 모세의 이야기속으로 들어 가보자. 모세가 우물물을 길어 마시고 우물곁에 앉아 쉬고있는데, 마침 그때 한무리의 여인들이 양떼를 몰고 우물에 다가왔다. 그들은 미디안땅의 제사장, 이드로라는 사람의  딸들이었다(16).  보통은 남자들이 양떼들을 치는데 여인들이 양을 치는 이유는 그집에 사내아이가 한명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아비의 양무리에게 먹이려 할때에 다른 남자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아내고 자신들의 양떼에게 물을 마시게 했다.

광경을 목격한 모세는 못본체 수가 없었다. 그는 정의감에 불타는 사람이었다. 모세가 벌떡 일어나 그녀들을 도와 양무리에게 마시게 하였다(17).

1) 애굽에서도 그는 자신의 동족인 히브리인을 돕기위해 궁정을 떠나 마을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애굽인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히브리인을 도와주었다. 지금도 그는 어려움에 처한 여인들을 도와주고 있다. 겉으로보기엔 비슷하거나 같은 행동으로 보인다. 그러나 애굽에서 그가 보인 행동과 지금 미디안광야에서 보인 행동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2) 동일한 정의감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못본체 수가 없어서 그들을 도왔다. 그러나 애굽에서 그는 자신의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폭력을 사용했고 결국 살인을 하고 말았다. 그는 먼저  좌우를 살폈다.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운 일이였음을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폭력적인 본능을 억제할 길이 없었다. 결과 그는 살인자가 되었고, 지명수배자가 되었고, 도망자가 되어 지금 광야에 있다. 그러나 미디안에서는 곤경에 처한 약자들을 돕지만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 그는 그저 약자의 입장에 서서 그들을 대변하고 그들편에 서서 함께 수고하며 돕는다. 거기에는 어떤 폭력도 없다.

. 아무리 좋은 동기, 목적이 있어도 과정이 바르지 못하면 안된다는 것을 그는 이제 깊이 깨달았던 같다. 선한 동기, 좋은 목적이 바르지 못한 과정에 면죄부를 주지 못한다. 동기가 좋고 목적이 선하다면 과정도 좋아야 한다고 말한다. 동기와 목적, 과정과 결과는 하나이지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과정이 선한 동기와 좋은 목적을 대변해 준다.

애굽에서는 왕자로서 자신의 신분과 자신의 권력을 무기로, 원동력으로 삼았다. 높이 있는 자가 낮은 자리에 있는 이를 내려다 보면서 무언가 의시대듯 적선하듯 도왔다. 돕는 자가 도움을 받는 자의 자존심에 상처를 내거나 물리적인 아픔을 안겨줄 있다. 그런 자세는 돕는 행위 자체가 폭력이 있다.

모세는 미디안에서 애굽과는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그곳에서 이제 오갈데가 없는 신세이다. 곤고하고 소망이 없으며 의지할 없는 신세가 되었다. 애굽의 모든 것들은 이제 지나간 과거요, 지난 과거는 미디아 광야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처지이다. 그는 이제 같은 약자곤궁에 처한 자로서 다른 약자, 다른 곤궁에 처한 자를 그들과 같은 처지에서 돕고 있는 것이다.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에게 물을 달라하신 예수님은 여인의 그릇된 삶과 망가진 인생을 조금도 책망하거나 꾸짖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의 도움이 필요한 자로 다가가서 그녀를 같은 처지에서 바라보고 돕는다. 이전까지 사마리아인들을 , 돼지 취급하던 다른 유대인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 가셨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 이웃들과는 다른 시각으로 다른 태도로 주님을 그녀를 대하신다.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이땅의 오신 하나님, 창조주에서 피조물이 되신 나사렛 사람 예수님은 우리의 진정한 도움이 되신다.

애굽에서 폭력을 동원한 도움으로 오히려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었던 그가, 미디안에서는 같은 입장과 처지에서 겸손하게 섬기는 마음으로 도왔다. 결과는 정반대의 것을 만들어 냈다.

애굽에서 철저하게 자기 자신의 편에 서있었다. 이제는 하나님의 편에 가까이 있었다.

3. 나는 (애굽에서) 나그네였다
하나님은 곤고한 모세에게 돕는 배필, 없는 떠돌이 모세에게 안식처인 가정이 생겼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부분적이지만 알고 섬기는 미디안 제사장의 사위가 되었다.

이야기는 결혼하고 아들딸 낳고 행복하게 살았더라로 끝맺음하지 않는다. 모세가 결혼하고 아이들 둘을 낳지만, 그들과 함께 머물고 가정이라는 울타리와 보금자리를 얻지만, 그는 그곳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된다.

게르솜, '께르' '나그네, 이방인'이라는 뜻이고 '' '거기서'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게르솜은 그곳에서 나그네, 거기서 나그네라가 되었다는 뜻이다. 언뜻 생각하면 애굽의 궁정, 양모의 품을 떠나고, 그를 낳아준 생모와 가족을 품을 떠나온 그가 지금 머무는 미디안에서 나그네로 있다는 고백처럼 들린다.

그런데 '거기' 어디냐에 따라 의미는 완전 달라진다. 거기가 지금 모세가 두발을 딛고 살아가는 미디안이라면, 자신은 미디안에서 이방인이요 나그네라는 의미이다. 말은 , 애굽이 그의 고향이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거기가 애굽이라면, 내가 거기에 거할 때에 나는 나그네였었다라는 고백이다. 내가 평생을 고향이요, 집이라고 생각했던 그곳이 이제 생각해보니, 이제 깨닫고 보니 이방인이었고 나는 그때 나그네였었다라는 고백인 것이다. 여기가 나의 고향, 집이라는 의미이다.

여기, 하나님을 섬기는 미디안광야 여기가 집이라는 고백이다. 과거 호화로운 삶을 살았던 애굽은 나에게 집이 아니었다. 나는 거기에서 나그네였다.
나는 거기 있을 때에 진정한 의미에서 머리를 놓을 곳이 아니었다는 의미이다( 9:58)

1) 우리는 나그네이다. 나그네에겐 쉼도 안식도 없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 진정한 안식과 평화가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젊은 시절, 신앙심 좋은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방황했다. 쾌락주의에 빠져 도둑질까지 서슴지 않았던 그는 카르타고에서 공부하면서 왕성한 지적 욕구와 학문적 열의로 불타오른다. 동안 그는 어느 소녀와 동거해 오던 372년에는 아데오다투스라는 아들까지 낳았다. 그러나 철학을 공부하고 성경을 무시하며 마니교에 심취한다 다음해 그는 마니교에 입교했고 대략 9 동안 충실한 마니교 신도가 되었다그는 수많은 영적 지식의 혼란 가운데 헤매던 384 밀라노로 건너가 암브로스의 설교를 듣고 크게 감화를 받는다. 그리고 2 뒤인 386년에 드디어 회심하게 된다.

그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내면의 채워지지 않는 갈증으로 고통에 시달릴 밖에 없단 사실을 고발하며 하나님을 잃은 인간이란 흙과 같이 무의미한 존재에 불과하다고 역설한다.

이는 '고백록' 전사상을 나타내고 있는 짧은 문장을 통해서 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는 결코 편안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는 진정한 쉼을 누릴 없다.

2) 모세에게 애굽은 이방인의 땅이었다. 애굽의 노예로 전락한 히브리인들만 땅의 나그네가 아니었다. 애굽의 궁정에 살면서 애굽의 왕자로 길러지고 호의호식하며 살았던 모세도 사실은 땅의 나그네였다.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님이 삶에 없는 인생은 모두 방황하는 나그네 인생이다.

우리에겐 여기가 애굽이다.

3) “있는 모습 그대로 오라, 떨며 나오라, 내가 쉬게 하리라

땅에 나그네로 살아가는 우리는, 갈급하고 헛헛한 우리의 영혼은 우물을 찾아 떠도는 존재들이다. 집으로부터 멀이 떠나오고 사랑하는 이와 관계가 단절된 우리는 소통과 관계가 시작되는 세상의 우물가를 서성이는 존재이다.

마침내 나를 쉬게하고 갈한 목을 축일 우물을 발견한것 같아 마셔보지만 여전히 목마르고 여전히 피곤한 것은 물을 담아두지 못하는 터진 웅덩이요, 쓴물을 내는 마라의 우물 같기 때문이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 우물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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