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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설교노트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by 소소한행복^^ 2020.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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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애굽기 3:1-5

 

애굽, 세상을 지칭하는 그곳에서 고통가운데 있던 하나님의 백성들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하나님은 반응하셨습니다.

들으시고
기억하시고
권념하셨습니다.

그들의 고통소리를 들으셨고
그들의 조상에게 하신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권념하셨습니다.

특히 우리가 권념이라는 단어에 주목했습니다. 권념의 반대는 외면, 또는 유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권념은 방문하여 돌보셨다라는 뜻입니다.
백성들의 고통소리를 들으시고 하신 약속을 기억하셔서 구체적으로 역사에 개입하시고 자신을 나타내심이 권념입니다.

"하나님의 권념'의 절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우리는 지난 시간 살펴보았습니다. 성경 전체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죄와 사망아래서 탄식하는 인간을 들으시고, 약속을 따라, 방문하시고 돌보시는 야웨의 '권념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백성들에게 찾아가셔서 돌보시는지 출애굽기 3장부터 보여주십니다.

 

게르솜- 나그네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의 이드로의 양떼를 치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어느덧 40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의 나이 80세가 되었습니다. 모세가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면 입가의 미소보다는 일그러지는 미간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모세의 지난 삶을 해석하는 그의 시각과 그의 마음의 상태를 안팎으로 보여주는 상징들이 성경에 등장합니다.

한 때 모세는 맹렬히 타오르는 불꽃같았습니다. 그 불은 자신을 태우고, 주변에 있는 것들을 태워 파괴하거나 소멸시키고 무서운 불이 였습니다.

욱하는 마음에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 충격과 참담한 실패, 좌절을 안고 그를 아무도 몰라보는 깊은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미디안 광야에 머물면서 그는 그곳의 제사장 이드로의 사위가 되어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들은 모세에게 희망을 주는 존재라기 보다는 자기가 누구인지 가르쳐주는 신세타령의 한숨처럼 작용합니다. 그래서 "게르솜'이라는 이름을 지어줍니다. "나는 거기서 나그네였다."

그가 서 있는 곳이 어디든 마음 둘 곳도 없고 안식할 곳도 없었습니다. 자신은 나그네라는 자각이며 한숨이었습니다. 그 당시 모세의 삶이 얼마나 적막한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모세는 그렇게 40년을 살았습니다. 1년도 아니고, 10년도 아니고 자그마치 40년을 모세는 기대도 없이, 희망도 없이, 눈물도 없이 그저 살아낸 것이었습니다.

 

떨기나무
모세는 양떼를 치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이집트 왕자로부터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목동으로의 전락했습니다. 깊은 회한과 상실감, 좌절감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을 것입니다.

양떼를 몰고 물과 풀을 찾아 그 뜨거운 광야를 걸어가면서 이따금씩 눈에 띄는 가시 떨기를 보면서 어쩌면 한숨을 내쉬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곳에서 자라고 있는 가시떨기, 또 아무 쓸모도 없는 그 나무야 말로 모세 자신의 모습인 듯 보였을 것입니다. 장년의 모세, 그는 자기의 무능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지금의 50대들이 느끼는 상실감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식들은 저 나름의 생활에 분주하고, 직장에서는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신세이고, 건강의 이상 징후가 자주 나타나고, 머리카락도 빠져서 속이 보이고, 가만히 돌아보면 자기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남들의 기대에 따라 처신해왔던 자신의 초라한 모습만 보입니다. 가시 떨기, 그렇습니다. 이게 바로 광야에 살던 모세의 자화상이요, 이 시대 중년들의 자화상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삶에 일 때 전환점이 생겨납니다.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삶에 영영 보이지 않을 것 같던 터닝포인트가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들으시고, 기억하시고, 권념, 방문하시고 그를 돌봐주셨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양 떼를 몰고 광야를 지나서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갔을 때에, 거기에서 주님의 천사가 떨기 가운데서 이는 불꽃으로 그에게 나타났습니다. 그가 보니, 떨기에 불이 붙는데도, 그 떨기가 타서 없어지지 않았습니다(출애굽기 3:1-2).

 

연약하다
하나님은 왜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그 떨기나무에서 자신을 나타내시고 모세를 찾아오셨을까요?

이 나무는 정확하게는 가시떨기나무입니다. 히브리어로 이 관목(bush) "쎄네"라고 합니다. 그 뜻은 '연약하다'라는 뜻입니다. 볼품없고 연약하기까지 한 광야의 가시덤불을 말합니다. 뜨거운 태양아래 시들시들 죽어가다 우기가 되어야 겨우 소생하는 그런 나무입니다.

*목재로도 쓸 수 없는 잔가지만 많은 나무... 땔감으로 쓸려고 해도 가시가 많아 부적합한 가시덤불.... 나그네에게 그늘을 만들어 쉼을 주거나.... 굶주린 동물이나 허기진 사람을 먹을 변변한 열매도 없는 그런 별 쓸모 없는 나무입니다.

*아니면 멋진 형태를 가진 잎과 향기로운 꽃을 가져서 보는 이, 냄새를 맡는 이를 기쁘게 하는 나무도 아니다.

*또 메마르고 먼지 많은 곳에 자리하고 있고, 촘촘히 잔가지가 얽히고 설켜서 바람이 불면 먼지까지 흠뻑 뒤집어써 더럽혀진 나무이다.

[무용지물]이라는 단어로 규정되어지는 압축하여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완벽하게 체념하며 죽지 못해 살고 있을 때 주님의 천사를 본 것입니다. 호렙산에서 양에게 풀을 먹이고 있을 때였지요. 주님의 천사가 떨기나무에 불꽃으로 임한 것이었습니다. 떨기나무는 불붙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타 들어 가지는 않았던 거지요. 모세가 의아하게 여길 즈음에 거기서 모세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찾아오신 거룩한 불
그런 떨기나무- 목마르고 괴롭고 아픈 존재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내가 아프니까 남을 찔러 괴롭게 하는 존재
연약하니까 자기 방어에 능해 가시가 가득한 존재
어디에도 쓰임새가 없는 존재
주목하지 않는 존재
철저히 잊혀진 존재

그럼에도 하나님의 본성이 긍휼과 자비의 충만함 이시기에 가시덤불같은 모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이름을 두 번씩이나 불러주시며 그를 찾아오신 하나님. 급하고 절박한 의무가 있는 것처럼 불러주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생각하여 보십시오.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서,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고린도전서 1:26)

예수님의 별명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였습니다( 7:34). 예수님은 높아진 사람은 낮추시고 불러주십니다.

 

꺼지지 않는 불
다른 방법도 아닌 불타는 모습으로 모세를 찾아오셨을까요?

여호수아에게 찾아오실 때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찾아오셨습니다. 강력한 전사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삼손의 부모에겐 영광스러운 모습을 한 천사의 존재로 오셨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이 만든 신상에 절하기를 거부하였다가 뜨거운 풀부불속에 던져진 다니엘의 세친구들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은 신의 아들처럼 찾아오셨습니다.

?

 1) 스스로 타오르는 불
하나님은 우리가 아니어도 스스로 타오르는 불이십니다.

하나님은 소멸되지 않고 계속 타오르는 거룩한 불이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타오르는 불입니다. 전혀 연료가 필요하지 않는 무한한 불, 소멸되지 않는 영원한 불이십니다. 그의 능력과 지혜, 영광과 권능이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2) 소멸시키지 않는 불꽃
하나님은 소멸되지 않을뿐더러 결코 소멸시키지 않는 자애로운 불이십니다.

불이 얼마나 무서운지요! 불이 삼키고 지나간 자리는 잿더미밖에 없습니다. 생명이 사라지고 희망이 꺾이고 절망한 가득한 곳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파괴하는 불을 '화마'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미디안 광야의 실패자요 패배자인 모세에게 찾아오신 불은 소멸시키는 불이 아니었습니다. 왜 그것 밖에는 아니냐고 책망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감싸주시는 따듯한 불꽃입니다. 저주와 사망의 굴레에 놓인 우리를 은혜와 생명의 옷으로 덮어주시는 분이십니다. 볼품없는 자를 당신의 영광으로 덧입혀 주시는 분이십니다. 질그릇에 담긴 보석이라는 말로 바울은 이것을 풀어서 설명하였습니다.

건조한 광야의 메마른 떨기나무에 임했으나 그 불은 소멸시키지 않았습니다. 소멸시키는 불이 아니시고, 심판의 불이 아니라 구원의 불이요, 죽음을 부르는 불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불꽃이십니다.

자애로운 불이었습니다. 그는 영원히 타오르는 불이지만 파괴하지 않고 소멸시키지 않는 불입니다. 오히려 따뜻하고 포근한 불입니다.

예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느냐?” 여자가 대답하였다. “주님,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요한복음서 8:10-11)

3) 이 큰 광경
모세는 그 모습을 큰 광경이라고 표현합니다.
"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3:3).

사람들은 놀라운 광경을 찾아 기꺼이 순례자가 됩니다. 인터넷 서핑을 밤새워하기 위해 마우스를 하고, TV 채널을 찾아 손에 들린 리모컨 버튼을 쉴 새없이 눌러 댑니다. 유튜브의 채널과 채널 사이를 오갑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놀라운 일은 무엇일까요? 역사상 가장 놀라운 일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아들이 베들레헴 구유에 오신 것도 놀랍지만, 갈보리의 나무위에 자신을 두신 것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놀라운 광경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본 떨기나무에서 결코 소멸되거나 소멸시키지 않는 불을 본 것보다 더 놀라운 일입니다. 아니 어떤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광경입니다.

그 때, 처음부터 이 일을 지켜봤던 로마의 백부장과 그 무리들은 다른 것을 보았습니다.

"백부장과 그와 함께 예수를 지키는 사람들이, 지진과 여러 가지 일어난 일들을 보고, 몹시 두려워하여 말하기를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하였다."(마태복음서 27:54)

1) 예수, 소멸시키지 않는 불
사람들은 평소기적을 행하고, 죽었던 사람들마저 살린 그가 십자가에서 놀라운 능력으로 자신을 증명해 보일 것이라 생각하고 몰려들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자기증명을 하라고 하였지만,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이 놀라운 광경이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서 오롯이 자신을 내어 주신 그것이 놀라운 광경입니다. 욕하는 자들을 향해 대신 욕하지 않으시고 용서를 간구하시는 모습이 놀라 광경입니다.

"그는 모욕을 당하셨으나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난을 당하셨으나 위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롭게 심판하시는 이에게 다 맡기셨습니다."(베드로전서 2:23)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두 명의 사람이 더 있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39)고 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진심이면 얼마나 다행이었겠습니까? 그런데 본문에 보면 비방하였다고 했습니다. 우편에 있던 강도도 처음에는 무리들과 함께 예수님을 조롱했지만 모세가 떨기나무에 붙을 큰 광경을 보려고 돌이킨 것처럼, 그도 뒤에 자신을 돌이켜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진실되게 고백합니다.

예수님, 주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누가복음서 23:42-43)

예수님은 진실로 회개하는 그에게 소멸시키지 않는 사랑의 불꽃이었습니다.

2) 예수, 소멸하지 않는 불
예수님은 끝내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셨습니다. 살아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어서 타인의 손에 의해 내려졌습니다. 그리고 무덤에 묻혔습니다. 그 때 그는 소멸하는 불처럼 보였습니다. 죽어 무덤에 묻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삼일만에 살아나심으로 소멸할 수 없는 불임이 증명되었습니다. 그 소멸할 수 없는 불은 오순절 성령의 불로 각사람위에 임하였습니다. 120구르의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습니다.

"그리고 불길이 솟아오를 때 혓바닥처럼 갈라지는 것 같은 혀들이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사도행전 2:3)

광야의 가시떨기나무 같은 우리에게도 예수님은 성령의 불로, 품어 주시고 감싸주시고, 정결케 하는 거룩한 불로 임하셨습니다.

광야에 계십니까?

돌이켜 그 큰 광경을 바라보십시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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