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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설교노트

[네 신을 벗어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다]

by 소소한행복^^ 2020.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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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애굽기 3: 1-5

 

물에서 건진 받은 사람 모세는, 애굽의 왕자였지만 살인을 하게 되고 그 결과 도망자가 되어 미디안광야에서 장인의 양떼를 돌보는 양치기가 됩니다. 어느 날 그의 평범한 일상에 비범한 일이 일어납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떨기나무가 사라지지도 않고, 그 불도 사라지지 않는 슈퍼 내추럴한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모세는 가던 길을 돌이켜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려고 다가갑니다. 그때 그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모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모세야, 모세야'라고 부르십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모세의 고통을 들으시고, 그를 기억하시고 계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때가차매 모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 날이 모세 인생의 터닝 포인트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적으로 만나게 되었기에 그러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불꽃 한 가운데 서시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는 그 불꽃 가운데 있었습니다. 불꽃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모세 자신이 광양 떨기나무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또 이 볼품없고 무가치한 가시떨기나무는 애굽에서 고통받는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간을 의미합니다.

'미드라쉬'라는 유대인들이 구약성경을 해석한 책은 이 장면을 이렇게 고찰합니다.
"
너는 이스라엘이 고난 중에 있는 것처럼, 나도 고난 중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왜 하나님의 사자가 가시떨기나무 불꽃 안에 임하셨는지 우리에게 알려주는 해석입니다. "너의 오랜 세월의 고통과 비통함 가운데 나는 늘 함께 했단다. 네 눈물 안에 있었고, 네 부르짖음 안에 내가 함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십니다.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지금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몰랐을 때에도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알게 되는 사실 중 하나는 내가 하나님을 알기전부터, 내가 하나님을 찾기 전부터 이미 그분은 나의 삶가운데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의식하지 못하고 내가 깨닫지 못했을 뿐이지, 그분은 내 삶 가운데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당신의 백성을 미리 아시고 그들의 전 생애에 걸쳐서 함께 하시며 모든 삶의 현장과 이야기 속에 동참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우리 삶 가운데 모세에게 현현하시듯 자신을 보이시고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며 찾아 주십니다.

 

가까이 하지마라
죄인은 하나님께 자력으로 다가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가까이 다가가려는 모세에게 "이리로 가까이 하지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가까이...말라 - 이 말은 죄악된 인간과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간격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가 있고 이를 해결하기 전에는 어떤 관계도 성립될 수 없음을 암시하는 말씀이십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3:23)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인간이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깊고도 넓은 간격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사이에는 창조주와 피조물이라는 본질적인 간격뿐만 아니라, 죄로 인해 깨어진 관계의 단절이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범죄하기 이전, 인간은 하나님과 대면하며 교제할 수 있었으나 범죄 이후 인간은 자력으로는 하나님께 감히 가까이 갈 수 없는 비천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3:24). 이 간격을 만든 것은 다름아닌 우리 인간입니다. 우리의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내었고, 그 누구도 자력으로 넘을 수 없는 장벽을 세웠습니다.

빛과 어두움이 공존할 수 없는 것처럼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가 공존할 수는 없습니다. 죄인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하나님 오심을 감당할 수도 없습니다. 죄인이 죄된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4:24, 참고, 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훗날 모세가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간청할 때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죄인에게 거룩하신 하나님은 그 자체로 소멸시키는 불입니다. 죄인인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자력으로 가까이 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가까이 가는 것은 불나방이 불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가까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디 모세뿐이겠습니까?

 

종교, 헛된 수고일 뿐이다
스스로 그 장벽을 넘어서려는 인간의 수많은 도전과 피나는 노력이 있었지만, 그런 모든 노력은 헛될 뿐입니다.

1) 라코타 인디언
라코타족(Lakota)은 미국 인디언 부족의 하나로, 수족으로도 불립니다. 서부 대평원에 거주하고 티턴(Teton)이라고도 불립니다. 1770년대에 아메리카의 중앙 북부 대평원으로 진출하였고, 현재는 사우스다코타주에 보호구역(Reservation)을 영유하고 있습니다. 라코타라는 말은 그들의 언어로친구’, ‘동맹자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처리하기 위해 독수리 발톱으로 남자들의 젖꼭지를 묶고 반대쪽 나무에 줄로 연결한 뒤 잡아당겨 몸을 찢습니다.

2) 차마고도 오체투지
오체투지, 자신을 최대한 낮추어 절을 하는 것입니다. 오체투지란 두 팔과 두 다리 머리를 땅에 대어 신에게 가장 낮은 자세로 경외심을 보이는 행위입니다. 절을 하기전에 손뼉을 세번 치는 것은 자신의 몸과 마음과 말을 뜻합니다. 그리고 땅에 엎드리며 이 세가지를 부처님에게 바치겠다는 것이지요. 이 순간 순례자들은 모든 중생이 자신과 함께 절을 하며, 부처님은 그 간절한 기원을 받아 주신다고 믿습니다.

3) 성철스님
성철 스님의부처님 오신 날법어 가운데사탄이여 당신도 부처입니다. 당신을 존경하고, 예배드립니다. 어서오세요라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분을 비난하고 불교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찾고자 애쓰시던 그분의 구도자적인 삶은 종교를 떠나 진리를 알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귀감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10, 8년을 '장좌불와'- 앉아서 미음같은 것만 먹고- 수행을 하셨답니다. 보통 사람은 8시간도 못할 일일입니다. 그러한 고행이 헛수고라고 고백해야만 했다면 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그분이 진심 어린 충고를 우리에게 하고 떠나신 것은 아닌지, 우리가 귀 기울여야하지 않을런지요.

성철 스님이 남긴 유언은 다음과 같다.
生平欺狂男女群(생평기광남녀군)하니/彌天罪業過須彌(미천죄업과수미)/活陷阿鼻恨萬端(활함아비한만단)이여/一輪吐紅掛碧山(일륜토홍괘벽산)이로다.’ (일생 동안 미친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수미산을 덮은 죄업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산채로 아비지옥에 떨어져서 한이 만갈래나 된다/한송이 꽃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혹자는 이것은 표면적인 의미보다 더 깊고 숭고한 의미가 있다라고 말들 합니다. 득도하지 못한 사람, 깊은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은 결코 깨달을 수 없는 심오한 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너무 어렵게 철학적으로 접근하여 본래 그분이 하고 싶었던 진의는 놓쳐버리는 우를 범하는 것은 아닐런지요.

내가 한 모든 것은 헛된 것이었다. 그것으로 내 죄를 씻을 수가 없구나. 당신들은 진리를 알게 되길 원한다는 진심 어린 충고는 아닐런지요?

 

종교로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2:21)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종교적인 의식이나 인간의 노력으로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자력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필요도 없었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셨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은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이 쉽지 십자가에서 운명하는 것은 신에게 어려운 일입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신이 인간을 위해 자신을 오롯이 내어주다니요. 자신을 배반하고 대적하며 거부하던 반역자를 위해 죽으신 것은 사랑입니다. 그분이 거룩한 속성뿐만 아니라 사랑이라는 속성을 지니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 십자가에서 하내 공의와 사랑이 만나고, 거룩과 긍휼이 입맞춤 하였습니다.

 

구원은 머무는 것이다
구원은 예수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이루신 것을 믿음으로 취하고 그 안에 머물며 누리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붙드는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의 죄가 끝장나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았던 장벽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다
예수님의 유언은 십자가상에서 하셨던 7마디입니다. 그 중 맨 마지막 말씀은 요한복음과 누가복음을 종합하면 "다 이루었다"( 19:30)하시고, 마지막으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23:46) 라고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말씀인가요?
누가복음을 기록한 의사 누가는 예수님의 운명 직전에 일어난 일을 증언함으로써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일의 실체를 보고하고 있습니다.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23:44-45, 참고, 15:38).

신약성경 히브리서를 쓴 저자는 그 의미를 이렇게 해석해 줍니다.
"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10:19-20).

예수님의 육체가 찢겨져 피를 흘릴 때 하나님께서 그것으로 인류의 죄값을 대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하나님의 보좌) 성소(인간이 종교로 갈 수 있는 최고의 경지) 사이를 막고 있던 휘장을 찢으셨습니다. 그것은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십자가 죽음을 나를 위한 것으로 믿고 취하면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컨펌해주시기 위해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났으며,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였습니다"( 27:52-53)

신발을 벗어라
하나님께서 열어놓으신 그 새롭고 산길을 가기 위해서 우리 인간이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발을 벗는 것입니다.

전도서 5 1절은 그 원리를 설명해줍니다.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찌어다."
신발을 벗고 집안에서 생활하던 우리 문화권에서 신을 벗는 다는 것의 의미를 우리는 큰 어려움없이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안과 밖에 대한 경계가 문지방이죠. 문지방 밖은 속세와 같은 곳이라면, 문지방 안쪽은 성스러운 곳입니다.
-내밀하고 친밀한 공간, 가족, 가까운 친구가 사랑과 우정을 나누고 꽃피우는 곳입니다. 부부가 밀애를 나누는 곳입니다. 할아버지가 아들에게 가훈을 말해주고 조상들의 은덕을 말해주는 곳입니다. 훗날 그 곳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똑같은 것을 나눕니다.

그 내밀하고 친밀한 곳으로 들어가려면, 문지방을 넘어서기 전에 반드시 신발을 먼저 벗어야 합니다. 신발을 벗는 행위는 문지방을 넘는다는 의미와 연결된 선행적 행위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종교적 상징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문의 모세는 그 순간 영적인 문지방을 넘고 있습니다. 이전까지 하나님을 알되, 지식으로만 알았는데 그 날 그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같은 공간에 거하여 그분의 얼굴을 보고 그분과 대화하는 대변혁이 일어났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성스러운 의식입니다.

그러므로 신발을 벗으라 하심은 거기 머물라는 말씀보다는 이제 문지방을 넘어 나의 성소로 나아오라는 초청인 것입니다. 모세 인생의 터닝 포인트입니다. 단순히 그가 광야생활을 청산하고 애굽으로 돌아가 이스라엘 해방하는 사역자가 되었다는 것을 너머 서는 의미입니다. 그가 신발을 벗었기에 그 문지방을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발에서 신발을 벗어라 하신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서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실패와 좌절을 내려 놓는 것이며, 자신의 성공과 자랑도 내려놓는 행위입니다. 죄인됨을 깨닫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회개함으로 자신의 지난 삶을 내려놓는 의식입니다.

 

수치를 벗고 거룩으로 옷 입어라
그런데, 신발을 벗는 것은 역설적으로 거룩하신 빛 앞에 자신의 수치를 벗고 거룩으로 옷 입는 순간입니다. 신발에는 그가 걸어온 길의 흔적이 묻어 있습니다.

성경 이사야 64 6절은 인간의 의가 더러운 옷과 같다고 증언합니다. 우리는 다 말라버린 풀과 나무의 잎사귀처럼 쇠락해가는 존재라고 증언합니다.
"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

허물과 죄의 수치를 벗고, 누더기같은 우리의 선행과 의를 하나님 앞에서, 그의 거룩한 임재 앞에서 벗는 행위가 바로 "신을 벗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그가 거룩해지는 순간입니다. 자신의 누더기같은 의를 벗고 하나님의 의를 덧입는 순간입니다.

내 것을 벗고 하나님의 것으로 덧입는 순간입니다. 내 것을, 나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지고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순간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의와 거룩으로 새롭게 빚어진 피조물이 되는 순간을 맞이합니다.

돌아온 탕자에게 새 신을 신겨주는 아버지를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소개하고 계십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15:22)

다시 아버지의 한 가족이 되고, 그 집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종교가 아닌 아버지께 돌아갔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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