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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설교노트

들으시고 기억하사 돌보셨다

by 소소한행복^^ 2020.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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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애굽기 2:23-25

혹독한 겨울도 아름답다. 인생의 겨울이 아름다운 것은 그 때 우리가 기도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 때가 이름다운 것은, 여전히 살아 계신 하나님, 여전히 거기 계신 하나님, 여전히 기억하고 계신 하나님, 신음과 탄식도 들으시는 하나님, 그리고 돌보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구약성경 전도서는 솔로몬이 쓴 인생 비망록입니다. 그는 인생의 계절에 대해 이렇게 표현합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도서 3:4)

솔로몬은 인생의 사계절을 말하고 있습니다.
희망을 품고 일을 시작하는 봄같은 시기가 있습니다. 열정을 쏟아 품었던 목표를 가꾸는 여름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가을같은 시기도 있습니다. , 여름, 가을은 힘들어도 견딜 만합니다. 뭔가를 기대할 희망이 담겨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울 때, 잃을 때, 버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인생의 겨울입니다. 겨울은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신 기간으로 참으로 애써야 하는 시기, 때론 눈물을 지어야 하고, 참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워 몸부림치다 지쳐 절망하는 시기를 비유하는 말입니다.

[추운 겨울이 오면 온 세상이 얼어붙습니다. 찬란한 꽃을 피웠던 꽃나무들도 차가운 겨울을 비껴가지 못합니다. 의도치 않게 찾아온 인생의 겨울도 자연에서 느끼는 현상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온기를 느낄 수 없는 차가운 인생의 겨울은 삶 자체가 고역입니다. 하루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마지못해 연명하기에 급급할 따름이지요.] 월간 내일에서....

그렇지만 성공적인 삶을 사는 지혜는 인생의 겨울을 잘살아내는 데 있습니다(월간 내일에서). 봄은 겨울을 잘 견디고 이겨낸 생명체만이 맞이할 수 있는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1. 여러 해 후에(23)
애굽 왕실의 왕자에서 미디안 광야의 양치기로 전락한 모세는 지금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습니다.
얼마만큼의 세월이 흘렀을까요?

<여러 해 후에> 23절입니다. '여러 해', 40년의 기간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겐 단지 여러 해이지만, 당사자에게 40년이라는 광야의 삶은 참으로 긴긴 세월입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 보낸 세월이 40이었는데, . 그만큼 미디안 광야에서 잊혀진 존재로 살았습니다. 이제 그를 아무도 애굽의 왕자로 기억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도 그의 눈빛에서 더 이상 꿈과 희망, 계획과 비전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모세의 겨울은 길고도 매서웠습니다. 그 겨울이 더 춥고 길게 느껴진 것은 거기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스라엘 백성이 거하는 애굽에는 하나님께서 계셨나요?

아니요, 거기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듯하였습니다. 아니 아무데도, 세상 어디에도 계시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들의 눈에 하나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에게도 그 대부분의 세월은 혹독한 겨울이었습니다. 그리고 몹시도 춥고 길었습니다.

2) 한 가닥의 희망마저 삭으라 들고 말았다
'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애굽의 정치지형이 바뀌었습니다. 그들을 학대하던 왕이 죽었으니 이제 그들에게도 봄이 찾아올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대하던 봄은 오지 않았습니다. 이어지는 문장은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울부짖었다고 증언합니다.

눈보라가 잦아들고 잠깐 햇살이 비추더니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이 불어왔습니다. “바로가 죽었기 때문에 이제 우리에게 봄이 오는구나라고 희망의 싹을 틔우기 위해 씨를 뿌렸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싹이 나질 않는 참으로 암담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다시 차가운 겨울로 회귀하는 상황이 전개됩니다. 희망이 꺾이니 약간의 서리와 찬바람도 더 혹독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 고통이 끝날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희망이 보이질 않으니 미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음에서 나오는 소리는 신음과 탄식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참으로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3) 탄식하며 절규하듯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들
이스라엘백성들이 그 고통스러운 현실, 바뀌지 않는 상황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은 탄식과 부르짖음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비로서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의 고통이 환멸이 영적인 목마름을 만들어 냈고 하나님에 대한 갈망을 갖게 하였습니다. 문제는 너무도 길었던 만큼 하나님과의 멀어진 관계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실까?” “우리를 돌아봐주실까?” “우리의 사정을 알고 계시고 관심을 가져주실까?”라는 의문이 그들을 지배하였다는 것입니다.

현실의 암담함만큼이나 하나님에 대한 기대도 얕었습니다. 그들이 그만큼 하나님께 멀리 있었다는 반증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조차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거예요.

'탄식하며 부르짖었다'라는 이 표현을 우리는 너무도 쉽게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잘 몰랐습니다. 애굽에 정착한지 거의 400년이 되었습니다. 애굽의 문화와 종교가 이스라엘의 뼈속까지 파고 들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만연한 인식만 있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하여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만큼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도 그들은 무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여전히 돌보고 계셨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반응을 세 동사로 표현합니다. 들으시고, 기억하시고, 권념하셨다. 본문은 우리에게 겨울을 만나 고통속에 있는 당신의 백성에게 어떤 분으로 존재하시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애굽 왕은 죽었고" 이 말은 우리가 결코 그냥 흘러보내듯 읽어서는 안되는 단어입니다. 천하를 호령하던 애굽의 왕은 죽었습니다. 세상의 신으로 추앙받던 파라오, 태양신의 아들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지 않으셨다는 완곡한 성경저자의 표현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생물은 그 기능을 발휘합니다. 그래야 생명을 유지하고 보전할 수가 있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을 당신의 지혜와 권능으로 만드신 하나님의 그 백성을 향한 행동을 본문은 세 가지 동사로 표현합니다. 첫째로,

 

2. 들으셨다(들으시는 하나님)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의 탄식과 그 부르짖음 마저도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그저 공기의 진동으로만 그칠, 허공을 맴돌다 사라질 그 소리를 하나님은 당신의 귀로 채집하셨습니다. 당신의 백성이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그 소리를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부르짖었다에 방점이 찍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셨다에 방점이 찍힙니다. 부르짖는 자의 수고가 아닌데 들어주실 의무가 없는데도 들어주셨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 부르짖지도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언약을 기억하시고, 하나님께서 권고하셨습니다.

 

3. 기억하셨다(기억하시는 하나님)
그럼 그 떼에 비로서 기억했다는 것인가?

비록 너희는 나를 잊을 지라도
나는 너희를 잊지 않고
비록 너희는 나와 맺은 언약을 깨뜨릴지라도
나는 너희와 맺은 언약을 기억한다는 것이다.

창세기의 노아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대신해 언약을 맺으시는 장면이 나온다.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9:16)

누가 보고 누가 기억하느냐?
Arc en ciel(
불어로 하늘에 걸린 활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활이 활시위를 망가진 것처럼 휘어졌고 방향은 위를 향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말하기를 "나 여호와가 지금 하는 언약은 내 생명을 걸고 하는 언약이다"라는 의미라고 해석합니다).

하늘을 향해 당겨진, 활시위를 걸어 두시고 당신의 생명을 다하여 약속을 지키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4. 권고하셨다(권고하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에권고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히브리어로 '파카드'를 영어성경은 '돌보다’,'집중하다는 의미의 look으로 번역하였습니다. 따라서권고하신다는 것은돌보아 주신다, 관심을 갖고 도와주신다또는 '방문하시어 돌보신다'라는 의미입니다. 권고의 반대는외면'입니다. 외면은얼굴을 돌려버린다. 포기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본문은 창세기 21장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잉태하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하나님께서 권고하시자 나이 늙어 경수가 말라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사라가 생명을 잉태하게 됩니다."( 21:1-2)

다음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본문은,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 50:24) 바로 요셉이 애굽에서 생을 마감하며 한 말속에 이 단어가 등장합니다.

[이 신앙은 아버지 야곱에게 있었던 동질의 신앙입니다. 부친 야곱은 창세기 48 21절에 『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허락하신 축복을 다 한 후에 아들 요셉에게 『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신앙을 한 마디로 대변하는 불변의 언어(言語)입니다.]

나는 죽지만, 하나님은 살아 계시니.... 그분이 너희와 함께 계시니 너희는 반드시 해방되어 자유와 번영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신약에 와서 이 땅을 직접 방문하신 하나님을 뵙게 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께서 죽음의 고통과 슬픔에 잠긴 사람들에게 방문하신 장면을 보게 됩니다. 그 장면은 하나님의 권고하심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함께 빠르게 살펴보십시다.

 (1) 달리다굼
회당장 야이로라는 사람의 딸이 심하게 아팠습니다. 백약이 무효하여 아버지가 예수님을 찾아가 간청하여 예수님을 모시고 집에 가는데 그만 야이로의 그 다급한 마음도 모르고 군중들이 몰려들고 주님의 발걸음은 늦어집니다. 마음은 급한데... 군중 속에서 한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집니다. 12년 혈루병으로 만성병에 시달리는 요인이었습니다. 그녀의 사정도 이만저만 딱한 게 아닙니다. 그러나 야이로의 입장에서는 그녀는 예수님의 발걸음을 늦추는 존재, 자신의 딸이 죽을 수도 있게 하는 방해물처럼 여겨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지체되어 야이로에 집에서 사람들이 찾아와서는 딸이 죽었으니 이제 그만 예수님을 괴롭히라고 말들 합니다. 그도 어쩔 수 없이 단념하려고 하는데 주님께서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의 비난에도 주님은 딸이 잔다고 하십니다. 정말 잠꼬대같은 발을 하십니다. 소녀가 죽어 뉘여 있는 방에 들어가 소녀를 향해 나지막한 소리로 말합니다.

 

"달리다굼!"



엄마가 잠자는 여자 아이를 깨울 때 하는 말입니다. '아가야, 일어나야지' ', 일어나야지'라고 말한 것입니다. 소녀가 벌떡 일어납니다.

 

(2) 청년아 일어나라(누가복음 7:11-17)
성경에서 가장 극적인 대비가 일어나는 장면이라면 저는 단연 이장면을 꼽고 싶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많은 무리와 함께 나인이란 성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나인성문에 가까이 들어가실 때 한 장례행렬과 마주칩니다. 일부러 연출한 것처럼 두 무리가 동네 어귀에서 만났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 자신의 전부요, 유일한 희망이요 삶의 이유요 목적이었던 아들이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죽은 청년의 관을 메고 동구 밭에 묻으려고 마을을 빠져나오는 긴 행렬과 울음소리... 어머니의 오열소리를 들으며 걸어오는 탄식소리들...

반면에 그 마을을 향해 방문하는 예수님의 무리들, 이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죽음이 마을을 나옵니다. 생명이 그 마을에 들어갑니다. 어머니의 눈물로 뒤덮인 청년의 관이 마을을 나옵니다. 아담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던 '살리는 영'이 그 관으로 다가갑니다.

(3) 나사로야 일어나라
죽어 장사되어 사흘이나 되어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나사로가 일어났습니다.

이유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고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생명의 창조주이며 주관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을 창조하실 때부터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권세를 부여받고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것 생명까지도 주관하십니다. 이 예수님께 나오면 누구든지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가 친히 권고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사십년전 이야기이니, 그 땐 대부분 가난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겨울은 너무 길고 춥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춥고 가난해도 부모님의 따뜻한 체온을 느낄 수 있다면, 그 추운 겨울에도 낭만이 있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추운 겨울, 검정고무신에 양말도 없이 맨발로 새벽에 아무도 걷지 않은 신작로의 눈 속을 헤치고 학교에 갔던 날이 아직도 머리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아직도 그날이 선명한 걸 보면 정말 추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주번이라 일찍 등교해야 했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등교하기 전에 난로를 피워 놓고 엽차를 끓여 놓아야 했습니다.

교무실에 먼저 들려서 당직 선생님에게 교실 열쇠를 받고 주번 출석체크를 해야 했습니다.
교실 열쇠를 받아 들고 교무실문을 나설 때 여전히 바람은 매서웠고 차가웠지만 마음은 어느새 찬바람을 이길만큼 따뜻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학교에 도착하니, 이미 교무실엔 벌써 환하게 불이 들어와 있었고, 들어서자 따뜻한 온기를 느꼈습니다. 당직선생님이 어서오라며 따뜻하게 맞아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언 몸을 녹이라며 난로 옆으로 초대해 주었습니다. 당직 선생님은 제 발을 보시고 깜짝 놀라셨습니다. 검정고무신, 맨발이었거든요. “, 양말도 신지 않고 이 추운 날 눈밭을 걸어왔냐?”며 물었지만, 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선생님도 더이상 묻지 않고 조개탄이 타고 있는 난로위에 놓인 노란색 양은 주전자에서 생강차를 컵에 따라 마시라고 건네 주었습니다.

삶의 혹독한 시련을 사람들은 겨울에 비유하곤 한다. 칼날 같은 바람, 뼛속까지 시린 차가운 공기가 채찍처럼 매섭게 살 속으로 파고드는 것처럼 인생의 시련도 그만큼의, 어쩌면 그 이상의 고통으로 다가오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봄날은 온다는 것. 겨울을 온몸으로 견디며 이겨낼수록 봄은 더욱 달콤해질 것이다(월간 내일에서)
솔로몬의 인생 비망록에 쓰여진 인생의 계절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떠해야 하는지 그의 지혜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여기서 그의 말이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봄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봄을 기다리며 꽃봉우리를 틔우고 새싹을 간직하고 그 자리에서 혹독한 겨울과 싸워 이겨낸 나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매화, 개나리, 진달래처럼 이른 봄에 꽃을 피는 식물들은 혹독한 겨울을 지나지 않으면 꽃을 피지 못한다고 합니다. 시골 집 울타리에 핀 개나리가 너무도 예뻐서 호주에 갖다 심었는데 여러 해가 지나도 꽃이 피지 않았다는 사람의 이야기는 많이 화자가 되었습니다.

사실 이런 나무들은 지난해 늦가을에 이미 꽃봉우리를 만들어 둔다고 합니다. 그래서 생리학적으로 엄밀이 말하면 이런 나무들의 개화시기는 봄이 아니라 가을이라고 과학자들은 말합니다. 이 나무들은 새싹을 품은 꽃봉우리를 간직한 채 차가운 겨울눈과 혹독한 추위를 고스란히 이겨낸 후 이른 봄에 꽃을 피웁니다. 그렇게 세상에 봄이라는 희망을 전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꽃들을 봄의 전령이라 부릅니다.

봄이 언제 올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봄은 반드시 옵니다. 인생의 겨울이 언제 끝나고 봄이 올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에 역사는 들려져 있습니다. 나의 인생도 그분의 손에 들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의 꽃봉우리를 겨울동안 간직해야 합니다. 더딘 것 같지만 겨울은 지나고 있습니다. 혼자인 것 같지만 살아 계셔서 들으시고, 기억하시고, 곤고하시는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혹독한 겨울을 하나님께 기도하며 견뎌내십시다. 그리고 멋진 기도응답의 꽃으로 낙망하고 절망하는 세대에 희망을 전하는 봄의 전령들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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