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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설교노트

내가 누구관대

by 소소한행복^^ 2020.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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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애굽기 3:10-12

1.  바닷가재 이야기
바닷가재는 깊은 바다에 밑바닥에 살아간다. 바닥에서 기어 다니며 먹이를 구하고 은신처를 마련한다. 몸을 보호하는 딱딱한 껍질을 벗어야 성장하는 특성상, 껍질을 벗는 시기에는 무방비상태에 놓이게 된다. 좋은 은신처는 한정되어 있어서 필연적으로 다른 바다가재들과 영역 다툼이 치열하다고 한다.

집게발을 권투선수처럼 휘두르며 자기 영역을 지키기 위해 아주 맹렬하게 싸운다. 승리한 바다가재는 의기양양해서 몸을 꽃꽂이 세우고 집게발을 들고 실제보다 자신의 몸을 더 커 보이게 부풀리며 다닌다고 한다. 두렵고 거칠 것이 없다는 듯 여기저기를 다니며 싸움을 건다고 한다.

패자는 잔뜩 수그린 자세로 바닥을 기어 다닌다. 놀라운 것은 예전에 자기가 싸워서 이긴 바다가재 앞에서 잔뜩 겁을 먹고 도망 다닌다고 한다.

그 원인을 찾기 위해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승자와 패자의 호르몬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고 한다.
승자- 뇌에는 신경전달 물질인 세로토닌이 비율이 아주 높다고 한다.
패자- 세로토닌은 아주 적게 분비되며, 도파민이 많이 분출된다고 한다.

세로토닌은 뭘까?
한마디로 행복감을 느끼게 해주는 호르몬이다.

2. 우리들의 이야기
이것은 비단 바다가재만의 이야기가 아니다고 캐나다 토론토대학의 심리학과 교수인 조던 피터슨은 그의 책 '12가지 삶의 법칙'에서 언급한다. 인간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그렇다. 패배보다 무서운 것은 패배 의식이며, 피해의식이다.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무가치하다는 패배의식이 더 문제이다.

3. 모세의 이야기
계속해서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미디안 광야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주를 만난 모세의 이야기는 이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1) 모세가 처음 목격한 기이한 장면은, 형편없는 떨기나무에 맹렬한 불이 붙었으나 나무는 소멸시키지 않는 불을 보았다. 이 가시떨기나무는 모세를 가리키며, 가시 떨기나무에 임한 불은 예수님이시다.
모세는 살인자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자기를 신뢰하던 자이다. 철저한 자기 중심, 자기 자아가 가득한 자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오셔서 그의 죄는 태우셨다. 그러나 모세는 태우지 않았다. 그 불은 정화시키는 불이지 소멸시키지 않는 불이었다. 이는 십자가를 의미한다. 우리의 죄를 제거하시고 우리에게 임할 심판을 대신 담당하신 예수님을 보여주신다.
실제로 그날 예수님이 모세에게 직접 오셨다. 인격적으로 대면하신 것이요. 죄를 사해주시고 구원의 확신을 심어준 날이다.

2) 그러나 이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를 위한 서막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당신께서 하실 일, 이스라엘을 구원을 말씀하시며 모세에게 사명을 주신다. 그날은 구원의 날이요, 소명 받은 날이다. 모세를 사명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콜링이다.

* 3:9-10/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3)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그는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하지 않는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을 구원합니까?"라고 대답한다. 그가 그러한 반응을 하는 것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a. 40년전 애굽의 황태자로 있을 때의 자신감이 넘치고 행동하던 모세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그에게서 찾아 볼 수 없다. 광야에서의 40년이 그의 몸과 정신도 늙게 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다는 표현을 빌면 이것이 그에게서 자신감을 빼앗아간 근본 이유는 아닌 것 같다.

b. 말도 어눌해 졌다. 40년 애굽 말을 쓸 기회가 없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쉬운 단어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 바로와 논쟁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설득하려면 고도의 논리와 그 논리를 뒷받침할 언어 구사력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단순한 회화 정도해서 될 일 아니다.

c. 그에게 숨겨둔 군대가 있나, 아니면 외인부대를 사서 부릴 군자금이 있나, 군대는 커녕 자기를 지켜줄 쌍칼이나 무휼같은 호위 무사 한 명도 없다.

자기도 지키지 못할 그가 무슨 바로의 손에서 그 땅을 떠날 마음도 없는 이스라엘을 구원한단 말인가?
계란으로 바위치기일텐데.... 정작 자기 손엔 그 계란조차도 한 알이 없다.

그가 주저하는 이유가 충분해 보인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그런 표면적인 이유보다 더 깊은 내면의 이유가 있었음이 곧 드러난다. 못하겠다는 그에게 하나님께서는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네가 백성을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들이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12)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이것은 모세에게 아무런 확신을 주지 못한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는데현재 뭔가를 보여주면 좋겠는데... 단지 미래의 일을 말씀하시니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속되는 부름에도 그는 다섯 번이나 못한다고 말한다. 이쯤 되면 그가 못하겠다고 하는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모세가 "내가 누구이기에" 라고 말하는 모세의 자기 겸손과 자기부인의 깊은 영성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그렇다고 현실을 객관적으로 살펴본 이성적인 사람의 말도 아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데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이는 그의 실패의식, 패배의식에서 나온 말이다.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보인다. 그는 자기혐오감에 시달리고 있다. 자기의 가치를 의심하기까지 한다. 그는 영적인 세로토닌이 부족한 것이다. 영적인 세로토닌이 부족한 이유는 그 자신의 부족과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때문이다.

4. 우리들의 이야기
이것이 모세의 진짜 문제이다. 이는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거룩한 부름을 이미 받았다. 구원과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들은 소명을 받았다. 그 부르심 앞에 우리는 모세와 같이내가 누구이기에라고 대답했고, 지금도 대답하고 있다. 사실 이는 우리 신앙생활의 근본적인 문제이다. 우리의 모든 문제는 그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를 부르시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이 문제이다. 그분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신앙생활이 고달픈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누구인지는 전혀 관심이 없고, 지금 가시적인 뭔가를 보여 달라고 하는 데만 급급해한다. 안보이니 믿음은 떨어지고 기도도 안되고... 나중에는 내 감정에 사로잡혀 사탄에게 노리개가 된다. 인생은 허비되고, 삶은 불행하며, 피해의식은 점점 깊어진다.

우리는 모두 패배한 바다가재와 같이 무기력하고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고 패배자요, 피해의식을 가진 자로 하나님의 부르심과는 무관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5. 시선을 돌려라
"
내가 누구이기에" 우리의 시선이 여기에 고정되면 우리는 어떤 위대한 시도도 도전도 못하고 살다가 죽는다. 모세가 하나님께 내가 누구관대. 라고 했는데,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도 모세에게 내가 누구인데 네가 걱정하고 주저하고 걱정하느냐?

정녕-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만 쓰실 수 있는 단어다.
내가- 일인칭 주격, 전후 문맥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내가"이다. 문장의 주어는 하나님이다.

내가 보내고,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내가 그들을 건져낼 것이다.
내가 너를 사용할 것이다.

신앙은 시선의 문제이다.

베드로가 물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향해 "나도 걷게 해주세요"라고 할 때 그는 물위를 걸었다. 그는 주님을 바라봤다. 그러나 이내 주님에게서 시선이 떨궈지고 시선이 상황과 자신에게 머물 때 그는 두려웠 고 물에 빠졌다. 그래도 그는 위대하다. 그만 홀로 배 밖으로 나가 물을 향해 갔기 때문이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그런 도전을 할 엄두도 못했다.

시선은 믿음의 머무는 곳에 닿게 되어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 11:1),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볼 때가능하다( 12:2)

불행을 떠나라
"
내가 누구관대", 패배한 바다가재 같은 사고를 가지고 살면, 불행하다. 자신의 능력보다, 하나님의 계획과 부르심 보다는 훨씬 못 미치는 삶을 살게 되며... 한 달란트 받은 종처럼 인생을 그저 남기지 못하고 현상 유지만 근근이 하다가 죽게 된다. 좋은 기회를, 달란트를, 은사를 묻어두고 살아간다.

한 번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한 달란트 받은 자처럼 그냥 땅에 내 인생을 묻어 두고 끝낸다.

"내가 누구관대이 말은, "그저 무사 무탈하게 살게 해주이소"라는 말이다. 그에겐 믿음도 도전도 없다. 도전이 없기에 성취도 열매도 없게 된다.

6. 적용(우리의 사명)
하나님의 모세를 구원하시고 그에게 사명을 주셨다. 그를 당신의 대리자로 부르셨다. 소명, 콜링을 받는 순간이다. 우리도 동일하다. 구원은 시작이요,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사명을 받았다.

1) 대단한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민족을 구원하는 거창한 일이 아니다.

~로이스와 유니게처럼 디모데를 잘 길러내는 일. 순전한 믿음을 자녀에게 물려줌

~마케도니아 교인들에게- 예루살렘 교인들이 기근으로 고통받는다고 하자, 힘에 지나도록 헌금하는 일

~바울 사도를 위해 헌금한 빌립보 교인들처럼

~옥에 갇힌 그를 위해 자신들의 목회자 에바브로디도를 파송하여 옥바라지를 하게 하고...

~엘리야 선지자를 자기 다락방에 모신 여인처럼

~가이오 장로처럼, 순회 전도자들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처럼

우리 가정만으로도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는 가정- 정말 주 안에서 행복한 가정만이라도 만들어 보자. 불신자 부부가 볼 때 "예수님 믿는 부부는 뭔가 달라도 다르네요."라고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은가. 근데 "당신들 보니 나가던 교회도 안 나가고 싶소."라던가 "예수 믿는 삶이 그런 거라면 난 믿고 싶지 않소."라면 큰 문제다.

2) 더 성장하고 성숙해야 할 사명이 있다
악이 아닌 본질적인 선을 행할 사명이 있다.

*고후 9: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
6: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찌니라

가슴을 펴고 소명의 삶을 받아들여라.
쉬운 길이 아닌 의미 있는, 하늘 아버님을 돕는 일을 해라. 착하게 살아라. 성장해라.

3) 제사장이 되어라, 공감해라
*
히브리인이 하나님께 받은 소명은 무엇인가? 가나안 땅에 사는 것이다.

이방족속이라하여 무조건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다. 죄는 미워하시되 죄인은 사랑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전할 자들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일하신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베풀 사랑과 긍휼을 나타내는 희생양으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무리는 복과 은혜를 보여주어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땅에는 죄악 말고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는 땅이었다.

인종말살이 아닌, 죄악을 말살하는 것이다. 제사장나라를 세워 그들을 구원, 온 민족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름 받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무엇인가?
공감능력이다.

4) 우리 자신을 위한 삶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사는 것은, 엄밀히 말해 하나님을 위한 것도 아니다.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이다. 우리가 가장 행복하고 안전한 삶을 사는 길이기도 하다.

모세가 예수님 만나기 전 80년이 전혀 무가치한 삶은 아니지만, 무의미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가시떨기나무의 예수님을 만나고 소명을 받고 그 소명을 따라 산 40년은 정말 복된 삶이 였다. 그 마지막 40년이 복됨으로 이전 무의미했을 80년도 의미 있게 바뀌었다.

그래서 그는 시편 84:10절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 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이다.

그가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다 감당하고 하나님 앞에 갈 때에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모세의 죽을 때 나이 120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34:7)

그는 하나님 앞에 가는 그 날까지 활기차고 건강하며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바다가재의 모습으로 표현하면, 세로토닌이 왕성하여 집게 팔을 높이 들고 있는 승리자의 모습이다. 가시떨기나무에서 부르심을 받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더 이상 패배자의 모습이나,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자의 모습은 결코 찾아볼 수 없다. 내적으로 성령에 충만한 모세의 모습과 육적으로도 건강하고 행복한 자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는 병들어 죽은 것이 아니다. 그는 무기력하게 인생을 비관하며 죽은 것도 아니다. 그는 개선문을 향해 나아가는 개선장군의 모습으로 죽음의 문을 통과하고 있다.

5) 누가 한 말일까?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내 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었으며, 병사로만 10. 백성은 어린애, 노인까지 합쳐 2백만도 되지 않았다.

배운게 없다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 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은 깡그리 쓸어버렸다.

나를 극복하는 그 순간 나는 징기스칸이 되었다.

내가 누구관대라는 패배자, 실패자,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나를 극복하는 그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다. 우리를 통한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고 우리는 가장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자아실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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