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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설교노트

준비된 지도자 모세

by 소소한행복^^ 2020.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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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21-4.14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고통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모세를 당신의 대리자로 부르십니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 보낼 만한 자를 보내십시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 앞에서 서며 이스라엘을 구원하겠습니까?"라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 갈 것이다. 그리고 나의 강한 손으로 바로를 칠 것이다. 그러니 너는 두려워 말고 이제 이곳 광야를 떠나 애굽으로 가라."하십니다.

그러나 모세는 온갖 구실을 대면서 못 가겠다고 합니다. 그가 거절하는 이유들은 대략 이렇습니다.

능력의 결여(3:11)- 내가 누구이기에/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언변의 결여(4:10)- 나는 말을 못해요.
메시지의 결여(3:13)-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뭐라고 이야기하죠?
권위의 결여(4:1)- 이스라엘백성들이 제 말을 안 믿을 겁니다.
적응력의 결여(4:13)-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광야의 양치기 주제에 뭘 할 수 있습니까?
성공한 전력(前歷)의 결여(5:23)- "내가 바로에게 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즉시로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할 것입니다."
전에도 그랬잖아요~
인정받은 전력(前歷)의 결여(6:12)- "모세가 여호와 앞에 고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자손도 나를 듣지 아니하였거든 바로가 어찌 듣겠습니까?"

이러한 모세의 말들 속에는 과거의 실패가 만든 트라우마가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과거의 실패가 만든 자신감의 결여와 그것이 다시 반복될 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를 붙들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자세와 말들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은근한 불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40년전에는 가만히 계시다가 이제 와서 다 잊고 있던 상처를 들추시고 그것을 재현하려고 하십니까?

40년전 모세는 지금의 모세와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그 때의 모세를 스데반 집사는 이렇기 묘사합니다. 사도행전 7:22-24의 증언입니다.

 

1. 스스로 준비된 지도자

1) 스스로 준비된 지도자 모세
"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7:22-24)

하나하나 세밀히 살펴보면 40년전 모세는 잘 준비된 지도자처럼  보입니다. 이스라엘을 바로의 손에서 구원해낼 적임자임에 틀림없습니다.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훌륭한 정치 지도자의 면모를 갖추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히브리인'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형제'라고 부릅니다.

-"그 형제를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이 얼마나 좋은 마음씨 입니까?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어려운 당하는 동포를 순수하게 도우려 했다.

이것만 보면, 모세는 굉장히 잘 준비된 사람 같습니다. 세상에서 이렇게 잘 갖춰진 인재와 리더를 만나가 쉽지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상에 보낸 사명이 있다고 여기는 사명자였습니다.

"저는 그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7:25)

그는 바로의 딸에게 입양되었지만, 친어머니가 유모가 되어 젖 땔 때까지 자신의 집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때 그는 히브리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습니다. 애굽 궁정에서 자라났지만, 어릴 때 확립된 히브리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우지는 못했습니다자신의 출생과 성장과정속에서 역사한 강력한 하나님의 섭리와 목적이 있음을 그는 알았습니다. 이것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감으로 여기고 살았 뿐만 아니라, 실행하려 한 것입니다. 굉장히 훌륭한 자세임에 분명합니다.

자기 자신의 호의호식을 위해 히브리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숨기거나, 자신의 동족의 고통에 눈감지 않았잖습니까?

그러나 그 때, 모세가 이스라엘을 바로의 압제에서 구원하려고 행동에 옮길 때 하나님은 침묵하시고 전능의 손을 들어 모세를 돕지 않았습니다. 왜 그 때는 안되고, 지금 부르시는가?

왜 힘도 권세도 지위도 열심도 사명감도 의협심도 넘치는 그 때는 안되고, 광야에서 비참하게 된 지금 모세를 부르시는 것일 까요?

2) 그때의 모세는 하나님 보시기에 준비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이 때가 모세가 뭔가 할 수 있는 적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여기지 않으셨다.

아무리 우리 생각이 옳고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기에 잘 준비된 사람이라고 자타가 인정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아직 준비된 게 아닐 수 있습니다. 세상 일에는 충분할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일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제만 만들고 주님의 영광만을 가릴 수 있습니다.

자기의 지위와 육체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3) 예수님이 12살 때, 성전에 올라갔을 때를 성경은 자세히 언급한다.

예수님께서 12살 되던 해에 부모님을 따라 예루살렘 성전에 가신 적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남자는 반드시 일년에 세차례 하나님께 자신을 보여야 했습니다. 성인으로 인정되는 나이가 13세입니다. 그러니 아직 예수님은 성전에 가서 예배할 의무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가셨고, 그곳에서 놀라운 일이 전개가 됩니다. 성전에서 당시 최고의 랍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시며 토론하셨습니다. 듣는 모든 사람뿐만 아니라, 랍비들 조차도 그러한 모습에 감탄하였습니다.
뒤 늦게 그 광경을 목격한 요셉과 마리아가 "왜 우리와 함께 집으로 내려가지 않았느냐? 우리는 너를 얼마나 애타게 찾은 줄 아니?"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의 답변은 아주 놀라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2:49)

하나님을 자신과 동등하게 여기는 말입니다. 사실 이러한 예수님의 말과 행동이 그를 십자가에 처형당하게 하였습니다. 신성모독죄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12살 때 성경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보기엔 그 때 바로 메시아로서의 사역을 하셔도 좋을 것 같은데... 그는 메시아로서의 사역을 당장 감당해도 될 실력과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다시 고향 나사렛으로 내려가셨다. 주님은 삼십세가 될 때까지 고향집으로 내려가 부모님을 섬기며 받드십니다.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2:51-52)

아직 하나님의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직 하나님 보시기에 준비되지 못하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첫번째 부르심인 한 사람의 자녀로서 부모에게 순종하는 삶을 사십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사실을 덧붙이신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52)

주님은 모든 영역에서 자라나셨다. 단지 어떤 한 영역, 지적인 능력이 뛰어나다고 다른 영역에서 자라나시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육체적, 정신적, 정서적, 영적, 사회적, 도덕적으로 모든 영역에서 건강하고 바른 자세와 태도를 가지셨다.

 

2. 하나님은 멀리 보십니다
왕궁에서 삶만 가지곤, 앞으로 이스라엘이 40년을 살게 될 광야의 삶을 지도자로 살 수 없습니다. 그는 눈앞만 바라보고 서둘렀습니다. 그리고 멋지게 실패했습니다. 조급하면 망치기 쉽다. 하나님은 멀리 보신다. 하나님은 멀리 보시고 전체로 보신다.

그가 참 쓸모 없다고 생각했을 광야학교가 없었다면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게 될 온갖 고통과 어려운 상황을 제대로 헤쳐 나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광야에서의 미친듯이 죄성을 뿜어내는 반응을 잘 돕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주님처럼, 우리의 인생을 좀더 멀리 보고, 전체로 볼 수 있다면 일희일비하며 즉흥적으로 살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이해 못하는 상황도 다 하나님의 크신 계획 안에 있음을 알기에 좀더 관조하며 지낼 것입니다. 힘든, 그 순간 마저도 누리며 성장과 발전의 기회로 삼을 것입니다. 실패 마저도 좋은 재료로 만드는 놀라운 역량을 발휘하는 멋진 인생을 살 것입니다.

 

꽃 밟을 일을 근심한다

꽃 밟을 일을 근심한다는 시집에 실린 시인 장석남(52) ‘입춘 부근이란 시의 한 구절이다.

끓인 밥을/
창가 식탁에 퍼도 놓고/
커튼을 내리고/달그락거리니/
침침해진 벽/문득 다가서며/

앉아 쉬던 기러기들 쫓는다//

오는 봄/
꽃 밟을 일을 근심한다

창가에 앉아 홀로 밥을 먹었습니다. 쓸쓸함이 묻어 납니다. 벽이 침침한 것 보니 아직도 추운 겨울날입니다.

그런데 문득, 기러기들이 비상하는 것이 보입니다. 겨울이 가고 있었습니다.

기러기들은 떠나온 나라로 돌아간다는 것은 곧 봄이 올 것이라는 신호입니다.

그럼 꽃 발을 일을 근심해야 할 것입이다. 그 꽃이 떨어지면 그 자리에서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인생을 멀리 보고, 전체로 보아야 하는지 말해주는 시 같습니다.

애굽 궁정에서만 자란 그가 광야생활을 경험하지 않고 40년을 자기 혼자도 아니고, 60만 넘이 넘는 지도하며 살아간다. 불가능하다. 광야를 책으로 보는 것과 사는 것은 다르다. 무용담을 듣듯이 광야를 경험한 사람의 말을 듣고 이해하는 것과 거기서 직접 모래바람을 맞으며 뜨거운 태양을 아래서 온몸의 진액이 다 빠져나가는 삶을 사는 것 하고는 다르다.

그를 먼저 광야에서 40년 구석구석 체험하게 하신 것은 멀리 보시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이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인생을 멀리 보신다. 또 전체로 보신다. 그리고 우리를 준비시키신다. 지금 당장은 고통스러운 광야는 그래서 우리의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최고의 학교가 될 수 있다. 앞으로 지금의 이 힘든 광야학교는 반드시 하나님을 위해 값지게 쓰일 것이다.

 

3.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그의 지위와 그가 애굽에서 배운 것들이 다가 아니다.

바로의 딸은 모세를 재미로 입양하지 않았다. 그는 친자식처럼 지극 정성으로 모세를 길렀다. 아니, 입양한 자이기에 오히려 친자식을 기르는 것보다 더 바르게 가르쳤을 것입니다. "애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게 하려고 홀어미께서 자식들을 더 바르게 키우시는 분들이 계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녀의 지극한 정성의 돌봄과 가르침을 받아 모세는 탁월한 모습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났다.

그러나, 그 표면에 드러난 모습이 다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부분이 더 중요합니다. 위기나 고통, 시험이나 환란이 아니면 쉽게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됨됨이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인격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광스러운 주님의 몸인 교회를 섬기려면 보이는 부분보다 보이지 않는 부분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분의 성품과 하시는 일을 알아야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두 천사가 여행을 하다가 어느 부자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그 집 사람들은 거만하여 저택에 있는 객실 대신 차가운 지하실의 비좁은 공간을 내주었다딱딱한 마룻바닥에 누워 잠자리에 들 무렵 늙은 천사가 벽에 구멍이 난 것을 발견하고는 그 구멍을 메워 주었다

젊은 천사가 그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눈에 보이는게 다가 아니라네." 그 다음날 밤 두천사는 아주 가난한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농부인 그 집의 남편과 아내는 그들을 아주 따뜻이 맞아주었다있는 거라곤 얼마되지도 않는 음식을 나누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침대를 내주어 편히 잠잘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다음날 아침 날이 밝았다그런데 농부 내외가 눈물을 짓고 있는 것이 아닌가그들이 우유를 짜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유일한 소득원인 하나밖에 없는 암소가 들판에 죽어 있는 것이었다

젊은 천사는 화가 나서 늙은 천사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내버려둘 수 있느냐고부잣집 사람들은 모든 걸 가졌는데도 도와주었으면서 궁핍한 살림에도 자신들이 가진 바 모든 것을 나누려 했던 이들의 귀중한 암소를 어떻게 죽게 놔 둘 수 있느냐고 따졌다그러자 늙은 천사가 대답했다

"눈에 보이는게 다가 아니라네우리가 그 저택 지하실에서 잘 때 난 벽 속에 금덩이가 있는 것을 발견했지그 집 주인은 탐욕으로 가득 차 있어서 자신의 부를 나누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벽에 난 구멍을 봉해서 그가 금을 찾지 못하게 한 것일 세어젯밤 우리가 농부의 침대에서 잘 때는 죽음의 천사가 그의 아내를 데려 가려고 왔었네그래서 대신 암소를 데려 가라고 했지눈에 보이는게 다가 아니라네."

지어진 이야기 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교훈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이긴 하다. 우리의 인생의 길에 때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있다. 납득하기 어려운 때도 있다. 이 이야기는 "눈에 보이는게 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우리의 개인적 경험에서 얻을 수 있는 귀한 경험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 더 큰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고 있음을 기억하고 살아가도록 가르치고 있다.

"눈에 보이는게 다가 아니다."

 

4.  눈에 보이는게 다가 아니다
모세의 광야 40년 인간의 눈으로, 세상의 성공이라는 안경을 쓰고 보면 그 시간은 참으로 무의미한 시간이요, 허비된 시간이며, 스펙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시간입니다.

먼저 비우고 채우시기 위해 하나님은 그를 광야학교에 입학시키신다.

하나님께서는 준비된 인물을 부르신다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 오랫동안 준비되었다. 미디안 광야는 그에게 믿음의 훈련장, 겸손의 훈련장, 인내의 훈련장이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한 일꾼을 부르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소관이시다. 모든 직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 말미암는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마가복음 3:13-15, 참고. 고린도전서 12:4-6, 에베소서 4:11-12)

그는 한 때, 실패의 트라우마가 있었다. 애굽에서 그는 그 때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처하며 뭔가를 하려고 하였다. 그의 육신의 힘과 애굽의 왕자라는 지위를 활용하려 하였다. 그러나 철저하게 실패했다.

그 때의 그는 폭력적이고 즉흥적이며, 자기방식을 선호했다. 하나님께 묻지 않았고,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

그는 광야에서 40년을 지나면서 자신의 무능을 깨달았다.

깎였다, 그는 죽었다. 그의 화산처럼 폭발하는 혈기와 폭력을 통해 일을 해결하려는 양아치나 고수가 아닌 '하수'들의 일 처리 방식에 대해 죽었다. 나는 할 수 없다고 한 그의 고백은 진솔한 고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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