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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설교노트

마라와 엘림

by 소소한행복^^ 2020.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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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15:22-27


들어가며

홍해를 은혜로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인도하시는 섭리 속에서 계속 3일 동안이나 건조한 사막 지역을 경유하여 남쪽으로 내려갔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시내산에서 당신을 섬기도록 미리 예정하여 인도하신 방향이었습니다(13:17, 18).


"사흘 길을 행하였으나"(22절)

그러나 이 지역의 특성 때문에 마시기에 필요한 물을 얻지 못하였으며, 동물 가죽 등에 담아왔던 물은 고갈 상태에 이르렀고, 이어 서서히 고통이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1. 백성이...원망하다(출 15:24)
1) 원망과 불평- 홍해의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고 환희에 찬 노래를 부른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원망과 불평을 쏟아낼 수 있을까요?

그것은

ㄱ) 홍해 앞에서 기도하지 않고 맞은 기적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토록 놀라운 기적을 당연한 것으로 알았지, 그것을 은혜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은혜를 은혜로 모릅니다. 그래서 감사할 줄 모크게 됩니다. 그래서 어려움을 만나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보다 원망과 불평을 쏟아냅니다. 마치 하나님께 무언가를 맡겨 놓은 자들처럼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5-6)

눈물로 씨를 뿌린 자만이 추수할 때 기쁨의 눈물을 흘립니다, 단을 가지고 돌아오며 찬양을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로또에 당첨된 사람들이 불행한 최후를 맞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감사를 모르는 축복은 저주가 될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는 자원이 풍부한 땅입니다. 그러나 그 자원으로 인해 끊임없는 내전을 겪으며 이전보다 또 다른 대륙보다 더 비참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원을 감사함으로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축복은 복이 아닌 저주가 되었습니다.

홍해의 문제 앞에 기도하지 않았기에 홍해의 갈라짐을 감사할줄 몰랐던 이스라엘은 마라의 쓴물 앞에서 원망만 쏟아 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쓴물을 내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더 근원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2) 이들의 원망 시점이 홍해 바다의 기적으로 인한 찬양의 감격이 채 사라지기도 전이었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즉 이들은 홍해 사건을 체험한 큰 기쁨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모세를 믿었던, 3일 전의 태도와는 달리 환경이 조금 변하여 갈증이 나고 육체가 피로해지자 곧 불평과 불만을 터뜨렸던 것입니다.

'원망'을 뜻하는 히브리어 '룬'은 '고집세다', '중얼거리다', '밤새워 머물다' 등의 뜻을 지니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밤을 세워가며 감정을 다해 불평했음을 나타낸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홍해를 건넌 후 이스라엘 자손이 터뜨린 첫번째 원망으로서, 그들은 하나님의 계속적인 능력을 경험하면서도 조그마한 역경에 부딪칠 때마다 불평과 원망을 쉽게 터뜨리고마는 간교하고 변덕스러운 인간의 속성을 여지없이드러내고 있습니다.


•위기의 때에 우리는 항상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참조, 출 14:10-12; 16:4; 17:3; 민 14:2; 16:11,41; 신 8:2,16).


•그들은 쓴 물을 쏟아내서 도저히 마실 수 없는 그 샘을 마라(쓰다)라고 불렀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마라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쓴물을 쏟아내는 오염된 샘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약 3:9-12)

야고보의 말대로라면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고 부른 찬양은 하나님에 대한 찬양보다는 자기들 기분에 도취되어 부른 노래인 것 같습니다. 물론 그들 모두가 다 그렇게 한 건 아니지만 대대수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죽지 않고 살아난 것이 기분좋아 부른 노래이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깊은 감사와 감동의 고백하고는 거리감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지금 마라의 쓴물 앞에서 그들이 쏟아내는 말들이 실재 그들 참 모습입니다. 홍해를 건넌 후 찬양하는 모습이 아니라, 지금 불평하고 원망하는 그들이 이스라엘의 참모습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마라의 웅덩이처럼 쓴물을 내는 우물이었던 것입니다.

계속해서 쓴 물을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도 괴롭고 주변 사람도 괴롭습니다. 자신도 아프고, 주변 사람도 쓰라립니다. 하나님도 속상합니다.


2. 하나님께서 치료하시다
•하나님은 그들을 고쳐주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신의 새로운 이름을 가르쳐 주십니다. ‘여호와 라파’- 나는 치료하는 여호와이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26절)
문자적으로 '여호와',와 '너희의 치료자'란 동격의 단어가 합성을 이뤄 만들어진 것으로, 직역하면 '나 여호와는 너희의 치료자'가 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절대자이신 동시에 우리의 모든 질병과 아픔을 치료해 주시는 완벽한 의사이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치료하는'의 히브리어 '라파'는 '의사' 또는 '의원'을 가리킵니다. 곧 우리의 의원되시는 여호와는 실로 모든 질병으로 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실 뿐만 아니라, 죽음과 죄 등 인생의 모든 문제점까지도 깨끗이 해결해 주시는 진정한 우리의 치료자이십니다(마 9:12).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찌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 103:1-5)

히브리어 성경에서 오직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말하기 위하여만 사용되었습니다. 시103:11-13은 그림을 그리듯이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묘사하는 세 가지 은유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 야웨께서 송축받으셔야 할(즉,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신다) 이유를 제시하는 일련의 분사를 주목해야 합니다.

1)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신다
2) 그가 네 모든 병을 고치신다
3) 그가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신다
4) 그가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신다
5) 그가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신다

이 다섯 가지 분사는 땅 위에서의 삶과 미래에 누릴 천국에서의 삶을 모두 망라한 축복입니다.

특히,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라는 표현에서 “질병”이라는 단어는 신 29:21 에서 이스라엘이 언약에 불순종함을 인해 받는 저주의 개념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즉, 단지 육체의 질병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병든 감정, 심령을 의미합니다. 죄성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용법 및 죄의 고침에 대하여 말하는 구약의 여러 본문(참조, 시 41:4; 사 1:6; 6:10; 53:5) 때문에, 이 절에서 분명히 병고침에 대하여 말하고 있음에도(참조, 출 15:26; 신 32:29; 시 147:3) 이 절의 강조점이 육체적 병고침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의문스럽습니다. 유대인들은 죄와 질병이 서로 관련이 있다고 인식하였습니다(참조, 약 5:13-18). 여기서 이 내용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신다”와 평행을 이룹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the Sin)니라"(롬 7:15-17)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1-25)


•바울이 그토록 고민했던 문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데 죄를 짓지 않고 싶은데 죄를 짓게 하는 그것, 자신 안에 있는 그 죄성을 처리하는 방법을 깨달았습니다.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찜인고"(렘 8:22)


먼저
1) 시험하여 그들을 드러내셨습니다
25절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쌔"

율례, 계명은 그런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본질적으로 잘못되었음을 드러냅니다.

*시험하실새 - 이 부분은 어떤구체적 사건으로 이스라엘을 유혹하시거나 시험(테스트)하셨다는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임을 증명(proof)하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그의 백성들을 시험하여 순종의 여부, 곧 신앙의 진위를 드러내신다. 그리고 이 시험으로 인한 시련을 통하여 인내와 순종, 자기 부인의 힘을 기르도록 하십니다(약 1:2-4). 이 부분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법도와 율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여 그들로 하여금 인내와 순종과 믿음등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적절한 시험의 연단으로 인하여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적합한 군대로서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는 자질을 구비하게 되었습니다.)

2) 치료의 나무로 고치셨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25절)

하나님의 치료는 근본적인 고치심입니다. 오늘 마라의 쓴물을 고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행하신 일은 다소 뜬금없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한 나무, 그 나무가 물에 들어가자 마라의 쓴물은 단물이 되었습니다. 이 나무가 상징하는 것은 명백합니다. 십자가입니다.

그곳의 물에 던져진 나무는 인생의 쓰라린 경험들을 달콤함으로 변화시키는 갈보리 십자가를 가리킵니다.

오직 십자가를 통과해야만 처리되는 것들이있습니다. 우리의 죄성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는 용서받으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를 죄를 짓도록 하는 그 죄성은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처리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죄값을 치르는 것과 그러한 죄를 짓도록 우리를 지배하는 죄성을 제거하여 본질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 사람으로 고침받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은 죄만을 용서하는 일에 목적을 두고 우리를 부르시지 않으셨습니다. 죄를 짖도록 우리를 지배하는 하는 우리의 죄성을 처리하시기 우리를 부르십니다.

홍해라는 경계를 넘어서 걷는 광야의 첫 여정에 십자가를 두시고, 죽음을 의미하는 삼일길을 걷게 하신 이유는 삼일길은 옛것에 대한 단절을 의미하는 거리와 시간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의미합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있었습니다.
-이삭은 자신을 불태울 장작과 불을 지고 삼일 길을 걸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된지 삼일 동안 무덤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첫기적을 베푼 가나혼인잔치도 삼일이 지난후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언제 비울이 십자가에 달린 적이 있습니까?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었지만, 바울은 로마에서 교수형을 당해 죽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합니다.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처리하신 것은 우리의 죄만이 아니라, 우리의 죄성도 처리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를 내게 적용하여 내 안에서 나로 죄를 짓게 하는 죄성을 처리해야 합니다.

마라에서 여호와께서는 자신을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YHWH 로페카)로 계시하셨다. 그분은 애굽인을 괴롭힌 질병들로부터 이스라엘을 건지겠다고 약속하셨다.


결론
십자가에서 처리된 사람들은 어떤 존재가 될까요?

1. 온전케 됩니다
온전케(딤후 3:16)-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1) 어떤 환경이나 요구에 대해 알맞은 존재, 적합한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2) 육체적 정신적 도덕적 영적(종교)적으로 올바르고 온당하여 결점이 없는 정상적이고 건전한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3) 짝이 되어야 합니다.
짝수는 수학에서 나오는 개념입니다. 짝수를 "짝이되는 수"라고 사전은 정의합니다.

그 누구도 인간은 완전하진 못합니다. 오직 완전함은 하나님께만 해당되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완벽하라, 또는 완전해라 요구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온전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이런 모순을 이룰 수 있을까요?

그것은 연합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로 누구와 짝이 되기에 걸맞은 사람이 되게 하신다는 말인가요?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짝이 될만한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짝수를 이룹니다. 그리스도에게 적합하고 온전한 짝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섬세하고 따뜻하신 말씀을 보내시어 우리를 빚어 가십니다.

이를 위해 번저 우리가 결코 그리스도와 짝하기엔 형편없는 불량품임을 먼저 보여주십니다. 광야에 서보니까, 광야에서 살아보니까, 우리의 본심이 드러난다. 우리의 형편없이 드러나게 됩니다. 우린 괜찮은 샘인줄 알았는데, 쓴물을 내밷는 마라였습니다. 학위도 있고, 부와 명예도 있고, 남에게 크게 지탄받을 짓을 한적도 없고.... 물론 자기 판단이지만, 그래서 괜찮은 존재인지 알았는데 그렇질 못했습니다. 세상에게는 괜찮은 짝궁이었습니다. 세상의 짝으로는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적합하고 인성맞춤이었다. 그러니 반대로 세상과 원수인 그리스도와는 그만큼 멀리있고 결코 적합한 존재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는 우리로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상황에 관계가 없이, 풍족한 애굽이던 부족한 투성인 광야이던 상관없이 너희는 나와의 관계속에서만 진정한 풍요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가르쳐 주시고 싶으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마라의 쓴물처럼 스스로 쓴물을 뿜어내는 병든 샘과 같습니다. 치료받아야 합니다. 오직 그 한 나무로만 됩니다. 십자가입니다.

탕자가 언제 온전해지는가요? 도덕적으로 완벽해질 때인가요? 아닙니다. 아버지에게로 돌아가 아들의 자리로 돌아갈 때입니다.


2. 엘림이 됩니다
열두 우물과 70그루의 종려나무가 있는 ‘엘림’은 우리가 십자가로 나아간 뒤에 얻게된 안식과 소생함을 가리킵니다.

*엘림 - '상수리 나무' 또는 '참나무'란 뜻으로 수에즈 동남쪽 약 100Km, 마라 남쪽10여Km 지점에 해당하는 지역으로서 오늘날의 '와디 구룬델'(Wadi Ghurundel)로 여기집니다(West-minster Historical Atlas to the Bibble). 당시 '엘림'은 비가 자주 왔고 개울과 샘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특히 이곳은 물샘 12개와 종려70주가 있었는데, 이는 완전수인 12와 70(7x10)이 상징하듯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완전한 휴식처와 안식처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몇몇 학자는 물샘 12개는 이스라엘 12지파를 ,종려 70주는 이스라엘 70장로를 각각 위한 것이고, 또한 상징하는 것으로 봅니다(Kurtz, Baumgarten). 따라서 이곳은 우연히 이스라엘이 도달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시고 섭리하심에 따라 인도된 곳이라 보아야 합니다.

종려나무는 이스라엘 나라 자체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국경을 정할 대 그 경계에 여기서부터는 이스라엘 나라라는 의미로 종려나무를 심습니다.

연회장이 평생 한번도 맛보지 못한 포도주를 마시고 기뻐하고 신랑을 격하게 칭찬한 것처럼 마라의 쓴물은 엘림이라는 풍족한 공급과 쉼으로 끝납니다. 열두샘과 칠십주의 종려나무 가 있는 곳으로 인도해 들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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